항목 ID | GC024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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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思悼世子 追尊 萬人疏 |
영어의미역 | Ten-thousand Persons' Memorial to Honor Crown Prince Sado as a K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영 |
성격 | 상소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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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55년 |
종결연도/일시 | 1855년 |
발생(시작)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
관련인물/단체 | 이휘병|이이순|이만희 |
[정의]
1855년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이 사도세자의 신원과 추존을 요구한 상소 운동.
[역사적 배경]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은 1792년(정조 16)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를 올렸지만, 정조가 신중론을 펼치면서 신원에 실패하였다. 이후 영남의 남인들은 정조의 사망과 노론 벽파의 전횡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사도세자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여 영남의 남인들은 다시 사도세자에 대해 왕으로의 존호(尊號)를 추존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기할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경과]
1855년(철종 6) 정월 영남 유림들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도회를 열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전모를 밝혀 책임 소재를 규명하기 위한 임오의리(壬午義理)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자 했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책임 문제를 다시 거론할 경우, 의도와 달리 다른 사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지적되어 사도세자의 신원과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조치를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유들은 상소문에서 “나라의 큰 의리가 영남에 있다”라고 한 정조의 말을 환기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국가의 의리를 바로 세우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에 장헌세자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하루 빨리 거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서고 선왕을 계승하는 도리에도 합당하다는 뜻을 개진하였다.
이 상소 운동은 이휘병이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이휘병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현감 이이순의 아들이며, 동생 이만희가 퇴계 종손으로 입후되었다. 따라서 이휘병 일가는 당시 진성이씨를 대표하는 핵심적인 인물들로 활동하였다.
[결과]
소두 이휘병 등은 10,432명이 연명한 상소를 철종에게 봉소하였지만, 철종은 비답 대신 승정원에 돌려주라고 지시하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이 만인소는 수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으로 영남의 유림이 결집하는 효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