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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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成龍宗家遺物 |
영어공식명칭 | Relies of Yu Soengryong |
영어음역 | Yuseongnyong Jongsonga Yumu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종가길 6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진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7년 7월 15일 - 유성룡 종가 유물 보물 제46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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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유성룡 종가 유물 보물 재지정 |
성격 | 유물|고문서 |
제작시기/일시 | 조선 중기 |
소장처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종가길 69] |
소유자 | 류영하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류성룡 관련 유물과 고문서.
[개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다. 또한, 화포 등 각종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도학, 문장, 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유성룡 종가 유물은 1967년 7월 15일 보물 제46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류영하가 소유하고 있으며, 김영훈과 김규익이 관리하고 있다.
[형태]
1. 유물
1) 갑옷과 투구(1구): 투구는 높이 24㎝, 둘레 63.5㎝, 지름 20.5㎝이다. 형태는 크고 작은 네 조각의 철편을 가죽 끈으로 연결한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진 모양을 하고 있다. 앞쪽의 반월형 해가리개는 남아 있으나 뒤쪽의 목가리개는 흔적이 없다. 갑옷은 가죽 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많이 손상되어 현재는 부분별로 남아 있다.
2) 가죽신(1켤레): 두꺼운 가죽을 측면에 대고 바닥을 2중으로 하여 꿰매었다. 일부 손상된 상태다.
3) 상아홀(象牙笏, 1개): 홀은 관직에 있는 관료가 관복을 입을 때 손에 쥐는 장식물로, 4품 이상은 상아, 그 이하는 나무로 만들었다.
4) 갓끈(4종): 호박(琥珀, 길이 86㎝), 골제(骨製, 85.5㎝), 오칠목제(烏漆木製, 84㎝), 밀화(蜜花, 84㎝) 4종이 있다.
5) 관자(貫子, 2종): 금관자(지름 1.7㎝) 1개와 옥관자 6개가 있다. 관자란 망건에 달아 당줄을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하는 작은 고리로 권자(圈子)라고도 한다. 금, 옥, 뼈, 뿔로 만들었으며, 관품에 따라서 재료 및 새김 장식이 달랐다.
6) 유서통(諭書筒, 1개): 조선시대 군사권을 가진 관원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명령서인 유서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 대나무 마디 하나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길이 48.4㎝, 지름 8.6㎝이다. 양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달았으며, 중심은 타원형으로 오려내어 자물쇠를 달았다.
7)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1점): 세로 36㎝, 가로 61㎝로, 류성룡이 휴대하고 다니던 지도이다. 한지에 담채로 그려져 있으나 아래 좌단은 손상되어 있다.
2. 「모부인분재기(母夫人分財記)」
류성룡의 모부인 김씨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가로 362㎝, 세로 67.2㎝ 크기의 한지 두루마리에 행서로 쓰여 있다. 앞부분은 충해로 심한 손상을 입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재주(財主)인 김씨의 방형묵인(方形墨印)과 문서 작성에 참여하였던 증인 및 필집(筆執)의 이름과 수결(手決)이 선명하게 있다.
3. 녹권(錄券)과 교지(敎旨)
류성룡(또는 부인)이 국가로부터 공신 또는 관직, 관작, 시호, 노비 등을 받은 문서로, 증명서 또는 임명장에 해당한다. 총 10매이며, 그중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 1590년 8월)은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지는데, 비단에 붉은 줄을 치고 해서로 썼다. 류성룡은 3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도체찰사교지(都體察使敎旨)」(1592년 12월 23일),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1592년 5월 2일), 「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1593년 2월 24일), 「정경부인교지(貞敬夫人敎旨)」(1596년 10월 9일), 「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1603년 10월 7일),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1604년 10월), 「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1606년, 1638년), 「광국공신녹패(光國功臣祿牌)」(1605년, 1606년),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1627년 7월 10일) 등 9매가 있다.
4. 비답(批答)과 제문(祭文)
불윤비답(不允批答) 3매는 1596년 9월, 1598년 2월, 1600년 11월에 관직을 사퇴하고자 올린 상소에 대해 국왕이 허락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문서이다. 제문 3매는 1607년 6월 8일에 선조와 왕세자(광해군)가 보낸 제문 각 1매와 1794년 4월 1일에 정조가 내린 제문이다. 정조는 화성을 조성할 때 류성룡의 축성 방략을 보고 감동하여 제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