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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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柳氏虎巖齋舍 |
영어음역 | Jeonjuryussi Hoamjaesa |
영어의미역 | Hoam Memorial House of Jeonju Ryu Cla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1[녹전로 588-17]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천근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11월 1일 - 전주류씨호암재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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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전주류씨호암재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재사 |
양식 | 홑처마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500년대 추정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1[녹전로 588-17] |
소유자 | 전주류씨 직제학공파 대종회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전주류씨 가문의 재사.
[개설]
전주류씨호암재사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과 지제교, 연안부사를 지낸 류극서(柳克恕, ?~1388)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재실 터에는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사(聖泉寺)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찰을 재사로 개수하였다는 것이다. 유빈고을은 류빈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취해 고을 이름이 지어진 경우이다. 류빈은 바로 골짜기에 전주류씨호암재사가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골짜기 안 깊숙한 지점에는 전주류씨 2세인 류극서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고, 류극서의 둘째 아들인 류빈은 여기 여막을 짓고 머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조 류습의 6세손인 류성(柳城)이 안동에 정착하면서 안동에서의 전주류씨 역사가 시작된다. 이들은 김성일(金誠一)을 통해 퇴계학통과 연계되며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7세손 기봉 류복기(柳復起)와 문규(門規)를 제정한 8세손 도헌 류우잠(柳友潛)이 그 종족적 기반을 확립하여 안동 일원의 벌족으로 성장한다.
[위치]
전주류씨호암재사는 녹전면 죽송리의 유빈골에 있다. 녹전면 소재지에서 2차선 국도를 타고 안동 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길은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동행하면서 서부리 쪽을 향해 뻗고, 다른 하나는 서행하면서 감애리 쪽으로 나아간다. 그 삼거리에 이르기 두어 굽이 전, 삼거리 가까운 지점에 진행 방향에서 왼편으로 커다란 표석과 여러 입석들이 입구 쪽에 몰려 서 있는 좁직한 골짜기가 열린다. 이 골짜기가 바로 유빈골로, 전주류씨호암재사가 홀로 위치한 곳이다. 골짜기 안 앞쪽은 밭이며 뒤쪽이 전주류씨호암재사 영역이다.
[변천]
「호암수묘기(虎巖修墓記)」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우리 선조 고려 보문각 직제학 선조의 의복과 신발을 묻은 곳은 의주(宜州) 서쪽 호암(虎巖)에서 경(庚) 방향을 향하고 있는 곳에 있다. 우리 목종 시기 말기에 이르러 묘소가 실전되었고,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찾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후 배위 수원이씨에 이르면 지금까지 4백 년 동안 어디에 묻혔는지 언제 묻혔는지 알지 못하였다.
아! 할아버지의 아들 손자 3대가 바로 이어서 벼슬을 지냈고, 그 후손들은 더욱 번성하여 벼슬아치가 이어서 났으니 이와 같은 가문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백세에 이르는 자손들의 한은 무엇인가? 청컨대 그 근본으로부터 말하여 보자면 무릇 할아버지의 고향은 완산(完山)이고, 돌아가신 집은 송경(松京)에 있었는데 자식인 영흥공 형제가 천리 멀리 운구하여 와서 여기에 장지를 잡을 것은 영흥군의 처가가 의주(宜州)에 있어서 이곳의 산천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장례를 치르고서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지냈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치고 꼴 베는 사람들은 영흥공의 성과 휘자를 써서 그 골짜기의 이름을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흥공 이후에는 도리어 경기 지방으로 돌아가 살았고, 5세를 지나서야 겨우 한 두 집이 남쪽으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우리 화산(花山) 양파의 선조들이다. 중간에 영쇄하여져서 향화가 오랫동안 끊어졌고, 우리 선조이신 기봉공(岐峯公)에 이르러서야 노인들에게 묻고 골짜기 이름으로 증거를 삼았으며, 의연당(依然堂)은 실전의 시기를 깨뜨리고 다시 묘소가 전해지게 하여 몸소 예를 올렸다. 참판 영순공은 그 때 영남을 맡고 있었는데 돌을 깎아 비를 만들어 세웠다. 상세한 것은 가고(家稿)에 전하지만, 수원이씨의 경우만은 불행하게도 가보(家譜)에 빠져 있어서 당시에는 후 배위가 있었는지도 몰랐으므로, 묘소의 유무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도 없었다.
450년이 지나 후손인 첨정 석창(石昌)씨가 여러 보첩을 널리 찾아보고 비로소 영흥공이 이씨를 위해 출계하였다는 것을 알았으나, 묘소의 유무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직제학 할아버지의 묘소 10여 걸음 아래에는 오래된 묘 하나가 있는데,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나, 할아버지 묘소와 사각형 모양 봉분이나 돌을 이용해 3층을 만든 것, 석인이나 석상 등의 제도가 하나처럼 같다.
묘광의 남쪽으로는 3단의 돌로 만든 구조물을 두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장명등(長明燈)이라 하는 것으로, 허리는 가늘며 사각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아래쪽은 처마처럼 갈아냈고 윗면은 원형의 공을 얹은 것이 영남의 분묘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인데 여기 두 묘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둘러보기만 하여도 한눈에 같은 가문의 묘라는 것을 단숨에 확인할 수 있다.
또 할아버지의 증손이신 전생공(典牲公)의 묘소가 여흥에 있는데 역시 이러한 모습의 입석을 두고 있으니, 이것은 족히 가문의 선조들이 이어온 묘제 중의 하나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아래의 묘는 지난 세월이 아주 오래 되었고 보축한 적이 없어서 석인 하나는 넘어지고 축단의 동쪽 윗돌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렸으니 후손된 사람으로서 슬픔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러므로 영남의 모든 친족들은 한 몸처럼 봉양하고자 하는 의논을 내어 온 적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계유년에 족인들이 시향을 위해 모였을 때 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제출되어 병자년인 금년 초여름에 두 봉분을 어렵게 깨치고 증거될 것을 찾으려고 광중 안을 팠으며, 그 봉분을 개축하였고, 넘어지고 깨진 것을 보수하였다. 입석은 바닥은 새로 하였고 지붕은 옛 것을 그대로 썼다. 5일 동안 공사를 마치고 성대한 제사를 드려 혼령을 위로하였다. 비록 지석이나 축문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하여 후손이 같은 살붙이라고 칭할 만한 증거가 뚜렷해지지는 않았지만, 전날의 허다한 증거를 오늘날 하나하나 살펴 볼 때 후대가 우러러 받드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애석한 일이로다! 우리 조상들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정성으로 당일 찾으려 애를 쓸 때에 만약 보첩의 세계에 빠진 부분이 없었다면 두 묘를 잃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 두 묘의 비슷한 법식으로 볼 때, 하나를 조상의 묘라 하고 다른 하나는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지금 두 묘가 다 지석이 없으니 하나는 믿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믿을 수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마을의 이름이 맏자제를 좇지 않고 둘째인 영흥공을 가지고 말하여지는 것은 영흥공이 뒷날 상을 치를 때에 혼자 있었고, 선비들이 그것으로 명명한 것이니, 어찌 비위를 잇는 후손으로 정해졌던 것이라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따라서 장로들은 그 사적의 원류를 적어 의론의 흐름에 결론을 맡기고, 후손들이 각자 헤아려 믿도록 하였다.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14세손 정휴(程休)와 양정(養正)이고, 15세손 약문(約文)과 술문(述文), 글을 쓴 사람은 15세손 휘문(徽文)이다.”
「호암재중수기(虎巖齋重修記)」 현판은 현대의 것이고, 내용도 간단하다.
“갑신년 9월 25일 호암재를 중수하고 부군의 유택을 정화하는 사업이 준공되어 안동시 녹전면 유빈골에 전국의 직제학공 후손 1천여 명이 운집하여 부군을 추모하고 위선사업의 기쁨을 자축하는 자리가 펼쳐졌으니 종사 이래 큰 행사라, 후손들의 자긍심은 추원지성(追遠之誠)으로 이어져 정재(淨財)가 모여 8천여 만 원이더라, 많으나 적으나 그 뜻은 하나이니 그 이름을 새김이 아니고 그 뜻을 새겨 기린다.”
[형태]
전주류씨호암재사는 아래 건물과 위 건물,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아래 건물은 위쪽 건물을 향하여 가운데가 터져 있는 디귿자이고, 위쪽 건물은 한일자이다. 아래 건물과 위 건물은 서로 떨어져 있다. 아래쪽에서 두 건물은 서로 높이가 다른 기초 위에 놓여지고, 위쪽에서 두 건물은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다. 아래쪽에서 두 건물 사이는 1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지붕은 위 건물이 아래 건물보다 높다. 위 건물의 양쪽 지붕 끝은 그 한편이 아래 건물의 용마루 속으로 파고들어 용접을 하듯이 서로 이어진다.
1. 아래채
앞쪽의 문간채는 5단으로 자연석을 쌓아올린 기초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정중앙에는 대문이 마련되어 있다. 앞마당에서 대문에 이르는 부분에는 6단의 계단이다. 아래채를 이루고 있는 각재와 판재들은 잘 다듬어지고, 새로운 것들이다. 대문의 판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물의 사방으로는 각각 1미터가 약간 안 되는 폭의 뜨락이 돌아가고 있다. 그 점은 안쪽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문간의 좌우로는 벽면을 관리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대문간의 오른편 두 칸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기초석 부분은 한 뼘 정도 넓이를 흙과 시멘트를 섞어 발랐다. 이 부분의 대문 쪽 칸에는 두 개의 원형 구멍이 뚫려 있다. 기초석 부분 위로 벽면은 반분되고 있다. 아래쪽 반은 나무판으로 처리되어 있고, 위쪽 반은 흙이 발라져 있다. 이 부분의 오른쪽 끝 칸에는 사각의 창 두 개가 조금 사이를 두고 만들어져 있다.
대문간의 왼편 두 칸도 서로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두 칸의 기초석 부분은 두 뼘 정도 높이로 횡단되고 있으며, 대문의 문기둥 쪽에 좁직한 삼각형 하나, 대문 기둥 다음의 기둥, 그러니까 우측 2칸 영역의 가운데 기둥 좌우에도 같은 삼각형 모양의 바람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기초석 부분 위쪽 영역은 아래 4분의 3, 위 4분의 1 정도 넓이로 양분되고, 아래편 쪽으로 각 칸마다 방문이 붙어 있다. 대문 쪽으로 가까운 칸에는 두 쪽 방문, 먼 칸에는 한쪽 방문이다. 나머지 벽면은 모두 흙으로 발라져 있다.
대문간 좌측 두 칸과 우측 두 칸을 처리하고 있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그 벽면 분할 방식도 서로 다르므로, 아래쪽 건물의 앞면에서는 대립의 미학보다는 차이의 미학이 중심적으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차이의 미학은 건물의 측면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건물 왼편의 측면을 살펴보자. 이 부분은 두 영역으로 나뉜다. 아래쪽 건물채의 측면 부분과 위쪽 건물채의 측면 부분은 1미터 정도의 틈을 두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 두 건물은 서로 높이의 차이를 가지며, 산기슭의 밋밋한 경사면이 그대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이 높이의 차이는 아래와 위의 두 채 건물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 건물채의 측면 각 칸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주초들은 위로 올라가면서 놓인 위치가 조금씩 높아진다. 마치 피아노의 음계처럼, 각각의 기둥들은 조금씩 높은 지점에 자리 잡은 주초에 또 조금씩 높이 올라선다. 그리하여 벽면은 위쪽, 그러니까 지붕 아래로는 같은 높이이나 아래쪽, 그러니까 주초 부분으로는 서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갖게 되고, 자연히 기둥은 아래로 올수록 길어지고 위로 갈수록 낮아지는 특징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벽면의 생긴 모습이 그렇게 다르므로, 각 벽면은 각 칸마다 분할 방식을 서로 달리하여 처리하였다. 그러한 차이로 전체 벽면이 가지고 있는 불안정함이 희석되고 조화의 화음을 갖추어내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맨 아래 칸은 주초 영역이 좀 높게 분할되고, 나머지 부분 역시 2분되어, 마치 벽면이 가로로 3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며, 그 가운데 칸 가운데 부분에 1쪽 방문이 달려 있다. 둘째 칸은 벽면이 가운데서 횡으로 2분되며, 아래쪽 중간 부분에 나무판 문이 달려 있다. 셋째 칸은 측문 영역이다. 이 측문은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사방으로 각재를 두르고, 다시 또 같은 크기의 각재를 아래 문지방 부분만 제외하고는 조금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각재와 각재 사이는 양 옆에서는 판재로 막고, 짧은 횡목을 중간에 박아 처리하였고, 위쪽으로는 조금 사이를 두고 틈목을 박아 처리하였다. 그 안쪽으로 두 쪽의 나무판 문이 달려 있는데, 이 나무판은 두툼하고, 오랜 것이다. 안쪽에서 보았을 때 나무판 문은 아래 양쪽은 절구 모양의 홈을 판 원통형 나무를 주추 위에 세우고 양쪽 각재기둥에 고정하여 나무문의 아래쪽 끝을 뾰족하게 깎은 부분과 요철로 맞물리게 하였고, 위쪽은 횡목의 안쪽으로 양편 끝이 조금 안으로 돌출한 곳에 홈을 마련한 횡목 부재를 덧붙이고, 역시 나무판의 위쪽 양 끝을 깎아 끼우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넷째 칸은 첫째 칸과 분할의 높이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아래채에 속한 영역이다.
2. 위채
위채는 측면 1칸이 조금 높은 기단 위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 벽면은 가로로 4분 되고 있다. 아래 3등분 영역은 첫째 칸이나 셋째 칸과 높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가운데에 두 쪽 방문을 붙이고 있으며, 맨 위 칸은 맞배지붕의 지붕 옆면을 포함하므로, 가운데 짧은 각재 기둥을 세우고, 양쪽으로 마름모꼴 벽면을 높이가 긴 부분을 중앙에 맞붙여 대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두 건물군의 오른쪽 측면은 왼쪽 측면과 처리 방식이 다르다. 이 부분은 건물의 바닥면이 거의 평평하게 밀어져 있고, 그 위에 이단의 키 낮은 석단을 쌓고, 두 석단 사이에는 좁직한 뜨락을 두었다. 아래 건물의 바닥면을 이루었던 경사는 그렇게 하여 조금 사라지고, 아래 건물과 위 건물 사이의 높이 차이는 조금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아래 건물의 각 칸은 역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왼쪽 측면의 경우보다는 동일성의 요소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쪽 건물 오른쪽 측면은 그 왼쪽 측면과 같은 모습이다.
뒤쪽 건물은 호암재사의 본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좌측 끝으로 두 칸과 우측 끝으로 한 칸은 방이다. 이 방에는 여러 곳의 전주류씨 유적들을 찍은 사진과 전주류씨 관계 도표 등이 돌려가며 게시되어 있다. 양쪽 방을 제외한 가운데 두 칸은 마루이다. 마루판은 오래 되고 두툼한 판목인데, 군데군데 홈이 파이고, 부분적으로 닳아서 울퉁불퉁해지기도 하여, 상당히 매력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마루의 뒤쪽 지붕 밑으로는 가운데 ‘호암재(虎巖齋)’라는 현판을 두고 우측으로는 「호암수묘기」가, 좌측으로는 「호암재중수기」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현황]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전주류씨 직제학공파 대종회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주류씨호암재사의 최초 건립 연대는 조선 선조 연간인 1500년대로 추정되나 현재의 건물은 그 형태로 보아 19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주류씨호암재사는 19세기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민가형 재실 중 하나로 19세기 재실의 한 유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