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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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係行 |
영어음역 | Gim Gyehaeng |
이칭/별칭 | 취사(取斯),보백당(寶白堂),정헌(定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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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
성별 | 남 |
생년 | 1431년 |
몰년 | 1521년 |
본관 | 안동 |
대표관직 | 성균관대사성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김혁(金革),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전(金腆)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계행은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배움에 재질을 보였다.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이미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14세 되던 해 부친이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447년(세종 29)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났다. 1461년 30세 되던 해에 안동부 길안(吉安) 묵계(현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하였다.
49세 되던 가을 식년 동당시에 합격하였는데, 많은 나이가 고려되어 바로 6품직에 올랐다가 이어 사헌부감찰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52세 되던 해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고령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웠다. 항상 청렴과 근신하는 태도를 지키며 매사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에서 부수찬, 부교리, 교리, 응교, 전한, 부제학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68세에 풍산 사제(笥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71세에는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만년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았다.
김계행은 76세 되던 해인 1506년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계행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학문과 사상]
15세에 한양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수강하였고, 그 뒤 성균관진사 시절에는 김종직과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충주향교교수에서 물러나 풍산 고향집에 돌아와 있던 때인 40대 중반 시절에는 당시 상주에 있던 김종직과 서로 왕래하면서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직접 강론하기도 하였다. 김계행은 굳은 의지와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經學)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성리(性理)의 문제에 침잠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1732년(영조 8) 초간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 5) 중간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김계행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