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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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方慶 |
영어음역 | Gim Banggyeong |
이칭/별칭 | 본연(本然),충렬(忠烈),상락군(上洛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고려 후기 안동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김민성(金敏成), 아버지는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활동사항]
김방경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가 양육했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1229년(고종 16) 음서로 산원겸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했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 부임 중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여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으며,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니 모두 김방경의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반주(班主) 전략(田略)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와 추밀원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여 몽고의 침입을 받던 난국의 새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 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이 1269년 원종을 퇴위시키고 왕제 안경공(安慶公)을 즉위시킴으로써 환도를 거부하며 반원 정책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원의 강력한 반대와 위협을 불러와 원종은 복위하였으며, 그때 김방경은 사신으로 원에 파견되어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다.
1270년 6월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힘쓰게 되었는데, 원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라는 책임을 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김방경은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에 들어가 원 세조(世祖)에게 환대를 받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도원수 흔도(忻都)의 총지휘 아래 원의 일본 정벌 때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되었다. 이듬해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상장군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다.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에 다녀왔으며 1277년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 등의 모함을 받아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으며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에 이송되었다가 원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 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1283년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개국공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1307년(충선왕 즉위년) 삼한삼중대광상락군개국공(三韓三重大匡上洛郡開國公)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