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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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緣 |
영어음역 | Gim Yeon |
이칭/별칭 | 자적(子迪),자유(子裕),운암(雲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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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487년 |
몰년 | 1544년 |
본관 | 광산 |
대표관직 | 강원도관찰사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적(子迪)·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할아버지는 김회(金淮)이고, 아버지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이지(李持)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연(金緣, 1487~1544)은 1510년(중종 5) 생원시와 진사시 양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을 거쳐 1524년(중종 19) 사간원정언이 된 뒤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때 김안로 일파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 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아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주살되고, 그 일파가 축출되면서 사간원사간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1542년(중종 37) 승정원동부승지 및 승정원우부승지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농정(農政)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가뭄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 지방에 대한 구황사업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김연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1544년(중종 39)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가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김연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상과 인품은 유학적 세계관과 접목되면서 합법칙성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퇴계학을 수용하여 도학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발판이 되었다.
2005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에 딸린 후조당(後彫堂)에 보존되어 오던 문중의 문집인 『오천세고(烏川世稿)』를 번역하였다. 『오천세고』는 김연의 저술인 『운암일고(雲巖逸稿)』를 비롯하여 그의 큰아들인 김부필(金富弼)의 『후조당집(後彫堂集)』, 둘째 아들인 김부의(金富儀)의 『읍청정유고(挹淸亭遺稿)』, 김부의의 아들로 김부필에게 입양된 김해(金垓)의 『근시재집(近始齋集)』, 김해의 큰아들인 김광계(金光繼)의 『매원유고(梅園遺稿)』, 그리고 김광계의 손자인 김순의(金純義)의 『과헌일고(果軒逸稿)』로 구성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운암일고(雲巖逸稿)』 2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북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