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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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涌 |
영어음역 | Gim Yong |
이칭/별칭 | 도원(道源),운천(雲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증조할아버지는 김예범(金禮範)이고, 할아버지는 생원 김진(金璡)이다. 아버지는 찰방 김수일(金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를 지낸 조효분(趙孝芬)의 딸이자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활동사항]
김용(金涌, 1557~1620)은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어 활약하였고,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예문관봉교 및 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간원정언, 사간원헌납, 홍문관부수찬, 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활약을 했고, 교리 재임 중에는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 그를 후원하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화 교육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잠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집의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광해군 1)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정3품의 문관 품계인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아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와 세상의 시비와 득실에 마음을 끊고 백운정에 기거하면서 갈건려장(葛巾藜杖)으로 소요하고 분향연좌(焚香燕坐)하여 독서하며 유유히 지냈다고 한다. 김용은 자제들에게 늘 “나는 맹자의 ‘궁불실의달불리도(窮不失義 達不離道)’의 여덟 글자를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너희들도 이 가르침을 마음에 두어 잊어버리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와 『당후일기(堂后日記)』가 전한다. 『운천호종일기』는 김용이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한 선조를 수행하며 1593년 8월부터 1594년 6월까지 쓴 일기이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84호로 지정되었다. 『당후일기』는 1615년(광해군 7) 윤 8월 6일부터 이듬해 6월 18일까지의 경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원제목은 『운천선조경연주대(雲川先祖經筵奏對)』로, 천(天)·지(地)·인(人) 3책의 필사본이다.
[묘소]
묘소는 안동 신곡(申谷)에 있다가 지동(枝洞)에 위치한 독자산(獨自山)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안동에 있는 임호서원(臨湖書院)과 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