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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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應祖 |
영어음역 | Gim Eungjo |
이칭/별칭 | 효징(孝徵),학사(鶴沙),아헌(啞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김농중(金農中)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수의부위(守義副尉)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응조(金應祖)는 1587년 안동(현 영주시)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목도하고는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응조의 형제 8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한 뒤 1634년(인조 12)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인조와 효종 및 현종 3대에 걸쳐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교리·홍문관부수찬·사헌부집의·사간원사간·응교·승지·오위호군·공조참의·사간원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시행했다가, 필요 없게 되자 1658년(효종 9)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인조 16)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면서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효종 7)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년(효종 10)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현종 5) 금성산성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이자 나이가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1667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만년에 영주와 예천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리며 노경의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 1660년(현종 1) 10월 학사정(鶴沙亭)에서 회합을 한 뒤 「제명록」을 남겼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예천 지역의 수락대(水落臺)에서 인근 선비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1662년(현종 3)에는 도산서원 성덕사를 배알한 뒤 이웃 마을 분천(汾川)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에서 예안 선비들과 만나서 우의를 다지는 한편 유학 문화를 진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학사집(鶴沙集)』·『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암랑동(巖廊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동시에 있는 물계서원과 영천시에 있는 의산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