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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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義貞 |
영어음역 | Gim Uijeong |
이칭/별칭 | 공직(公直),잠암(潛庵),유경당(幽敬堂),정간(靖簡),문정(文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유경당(幽敬堂). 증조부는 김종석(金從石)이고, 할아버지는 군수 김휘산(金徽山)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의정(金義貞, 1495~1547)은 재기가 뛰어나 8세에 글을 지었으며, 약관에 이미 문장이 성취되었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명되었고, 인종의 세자 시절, 학문을 가르쳤던 세자시강원사서가 되어 중망이 높아지자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된 이후 공조정랑·예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 등을 역임하였고, 1545년 종부시첨정이 되었다.
1545년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김의정은 지난날 인종에게 국사(國士)의 대접을 받았던 성은에 보답하지 못함을 애통해하며 바로 사직하고 오릉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으로 내려와 모든 교유를 끊고 시문으로만 소요자적하면서 지냈다. 자신의 호를 유경당(幽敬堂)에서 잠암(潛庵)으로 고치고, 마을 이름도 오릉동(五陵洞)에서 오묘동(五畝洞)으로 고쳤다. 또한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가지 말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김농(金農)으로 고쳤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인 『잠암일고(潛庵逸稿)』 5권 2책이 있다. 유작 「천형부(踐形賦)」와 「기강부(紀綱賦)」는 『동문선(同文選)』에 실릴 만큼 명문장으로, 정암 조광조(趙光祖)는 「천형부」를 읽고 “말의 이치가 지극하게 갖추어져 있고 참으로 경학 중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호음 정사룡(鄭士龍)은 「기강부」를 읽고 “이 책의 의논이 심히 아름다우니 평소의 실천이 얼마나 독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영가지(永嘉誌)』와 『안동읍지(安東邑誌)』에는 김의정이 문장과 절행으로 일세의 이름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