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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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翰東 |
영어음역 | Gim Handong |
이칭/별칭 | 한지(翰之),와은(臥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증조할아버지는 김성구(金聲久)이고, 할아버지는 김여당(金汝鏜)이다. 아버지는 좌랑 김경필(金景泌)이며, 어머니는 정주현(鄭周鉉)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한동(金翰東, 1740~1811)은 안동(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났다.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었고, 1781년(정조 5) 경릉참봉이 되었다. 1787년(정조 11) 대륜차(大輪次: 과거의 불합격자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서 부(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으며,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거쳐, 1791년(정조 15) 사간원헌납이 되어 수해를 입은 영남 지방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있으므로 환곡(還穀)의 환수를 연기해 줄 것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홍문관수찬을 거쳐 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 1794년(정조 18) 순천부사를 지냈다. 1796년(정조 20)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가, 1797년 외직으로 나아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799년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1802년(순조 2) 천주교를 신봉하여 각종 제례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사헌부지평 정언인(鄭彦仁)의 탄핵을 받고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흡곡(歙谷)으로 이배된 뒤 1805년(순조 5) 풀려났다. 김한동 사후인 1900년(고종 37) 왕이 그의 충절을 기려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인 『와은집(臥隱集)』 8권 4책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안현(鞍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