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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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雲龍 |
영어음역 | Ryu Unryong |
이칭/별칭 | 응현(應見),겸암(謙菴),문경(文敬),유운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부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 아버지는 류중영(柳仲郢)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류성룡(柳成龍)의 형이다. 아들 류기(柳䄎), 손자 류원리(柳元履), 증손자 류세철(柳世哲)과 류세명(柳世鳴, 1636~1690)을 두었다.
[활동사항]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1572년(선조 5)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도사로 추배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제가 되었고, 금부예천과 풍저창직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한 뒤 진보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가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배되었다. 자리를 옮겨 광흥창주부와 한성부판관, 평시서령, 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류성룡이 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류운룡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1592년 가을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인데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에게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 봄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와 태백산(太白山) 아래 도심촌(道心村)에 우거하였고, 12월 동생 류성룡과 함께 도심우사(道心寓舍)에 우거하였다.
[학문과 사상]
1561년(명종 16) 23세 때 도산(陶山)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농운정사(隴雲精舍)에 머물면서 『사기(史記)』를 배웠고, 1562년 류성룡과 함께 이황을 배알하였다. 계상서재(溪上書齋)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1566년 이황에게 상서하여 정주(定州)에서 중간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수정 및 증주목록(增註目錄)의 일을 여쭈었다. 학문에서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겸암집(謙菴集)』이 전하며, 「기사문상장시사(記師門喪葬時事)」를 지었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5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34년 7월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다. 또한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한 덕으로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