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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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이행묵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에 있는 나루터의 어제와 오늘.
[개설]
길은 물길이든 뭍길이든 사람이 오가고 물건을 교환하며 정보와 문화를 교류하는 열린 교통로 역할을 한다. 전통 시대에는 하천과 같은 물길을 따라 교통로가 열렸고,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지역 간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 현대사회와는 다르게 수운 교통이 하나의 생활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부여는 백마강 유역을 따라 비슷한 문화적 특성이 나타났다. 백마강은 금강 중류, 특히 부여 지방을 흐르는 금강을 부르는 별칭이다.
일반적으로 하천 유역의 시장권은 하천을 이용하여 원거리 교역이 이루어졌다. 하천의 포구와 내륙의 장시가 연결되면서 국지적 교역이 보부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시장권을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하면서 중층적 구조를 띠고 있다. 장시망과 수로망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주요 도로와 연결되는 진(津), 도(渡), 포(浦)가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내륙 주요 도로의 결절점, 행정 및 인구의 중심지인 읍치 등의 장시와 연결되었다. 금강 유역에서 주목되는 곳은 한자로 진(津)이라고 쓰는 ‘나루’이다. 전통 시대 나루는 물길과 물길을 연결하고, 장시와 장시를 이어 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부소산을 감싸고 돌아 부여읍을 흐르는 백마강의 나루에는 장시와 관련이 깊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창강나루, 왕진나루, 규암나루, 세도나루 등은 모두 인근에 장시를 낀 나루터이며, 장시로 모이는 물류의 집산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지역 내 장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백마강의 나루는 모두 제각기 역사가 숨어 있다.
[창강나루 이야기]
창강나루는 공주에서 흘러드는 금강이 부여와 처음 만나는 지점에 있는 나루이다. 창강나루는 청양군 청남면 동강리 강정마을과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서원말을 연결한다. 조선시대에는 창강나루에 정부에 납부하는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인 원창(元倉)이 있었다고 한다. 창강나루 상류인 공주시 탄천면에는 원창의 분창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도 분창리였다. 창강나루는 1940년대까지 군산과 강경, 공주를 연결하는 돛배가 운항하였다고 한다. 창강나루는 인근 장시일을 기준으로 3인이 5일씩 순번제로 나루를 지켰다. 나루터로 장삿배가 들어오면 화물을 나르는 짐꾼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결성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짐꾼은 주로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었으며, 하역과 선적을 도맡았다. 일제 강점기 기록에 따르면 운항 선박이 42척에 이르렀고 하루에 통행하는 인원은 50인이었다.
창강나루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청양군의 청남면 동강리, 천내리, 청소리, 중산리와 부여군의 저석리, 신정리, 공주의 탄천면 마을 사람들이었다. 창강나루를 이용하여 사람들은 인근의 왕지 시장과 부여 시장을 왕래하였다. 창강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사공에게 이용료 명목으로 수곡을 냈다. 여름에는 호당 보리 1말, 가을걷이 이후에는 벼 1말을 지급하였다. 자주 이용하는 마을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이용할 때마다 사용료를 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통학 문제로 나루를 건너는 학생 또한 적지 않았는데, 학생이 있는 집에서는 두 배를 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창강나루 인근에 있는 왕지장은 부여에서 매우 번성한 오일장 중 하나였다. 왕지장과 창강나루는 부여, 청양, 공주가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대포구인 강경포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아 물화 유통이 매우 활발하여 장시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창강나루는 그 길목이 되어 주었다. 장시일이 되면 창강나루를 통하여 쇠전, 싸전, 어물전, 채소전, 일용 잡화전 등에 물건이 없을 정도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왕지장은 1934년 큰 수해를 입고 복원되었으나 1946년 다시 홍수로 유실되었고, 창강나루 또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규암나루 이야기]
규암나루는 백마강 서쪽으로 부여읍과 마주하고 있는 규암면의 자온대 뒤에 있다. 조선 후기에 부여현의 세곡 물류를 보관하던 해창(海倉)과 홍산현의 세곡 물류를 보관하던 홍산창(鴻山倉)이 있었다. 예부터 백마강 일대의 나루 중에서 가장 물류 이동이 큰 나루였다. 규암나루 인근에는 규암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금강 수운과 내륙 육로를 연결하는 결절점에 위치한 곳이었다. 18세기 이후 저산팔읍을 중심으로 하는 보부상 집단이 형성되면서 규암나루 지역의 장시가 크게 성장하였고, 규암나루는 홍산장과 은산장을 금강 수운과 연결하는 중요 지점이 되었다. 금강의 수운을 통하여 상류의 왕진나루와 창강나루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하류의 강경포구와 임천장과도 연결되었다.
규암나루는 두 곳이 선착장이 있다. 하나는 규암면 쪽 선착장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읍 쪽 선착장이다. 양쪽에서 모두 배를 띄울 수 있었다. 규암나루에서 하류로는 주로 강경을 왕래하는 선박이 드나들었는데, 돌배라고 한다. 돌배는 수십 톤급의 통력선이며 이 외에도 여러 상선이 정박하였다. 일제 강점기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차량을 실어 나르는 넓적배라고도 하는 차도선이 운항하였다. 차도선은 부여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한다. 사공은 규암리 주민 중에서 선발하였다. 규암나루는 규암면과 부여읍을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룻배 2척이 운항하면서 백마강 양쪽을 넘나들 수 있었다. 규암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월급을 지급받는 사공이 10여 명이 있었고, 짐을 나르는 하역 노동자가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9년 조사에 따르면 규암나루의 출입 선박은 200석을 적재할 수 있었고, 화물의 무게는 4,203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규암나루를 통하여 들어온 화물은 소금, 잡화, 목재가 중심이었고, 나가는 화물은 쌀과 곡물이 주류였다.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부여지』에 따르면, 규암과 부여를 오가는 나룻배 2척에 사공 2명을 두어 하루 최대 도강 인원은 4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백마강 일대를 도강하는 나루터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까지 번성하던 규암나루는 오히려 해방 이후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운과는 상관없이 육로 교통이 점차 발달하면서 수운의 필요성, 즉 나루터의 기능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부여읍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군청 소재지로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부여읍을 중심으로 상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주변에 있던 오일장은 기능이 크게 줄어들었다. 더 이상 나루를 중심으로 물류 이동이 필요 없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68년 부여군의 오랜 숙제였던 백제대교가 준공되었다. 백제대교는 부여읍과 규암면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사실상 규암나루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백제대교가 건립된 이후 규암나루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나, 지금은 부여를 찾는 관광객을 위하여 유람선의 형태로 운항하고 있다. 부여군에서는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낙화암과 구드래나루, 자온대를 연결하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그나마 규암나루의 명맥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세도나루 이야기]
세도나루는 규암나루 다음으로 큰 백마강의 나루였다. 부여 지방의 남부 지방에 있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남부 지역 사람들이 대포구인 강경장을 이용하려면 세도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야 하였다. 세도나루는 부여군의 장암면, 임천면, 충화면, 양화면 주민들이 이용하였다. 세도나루의 건너편에 있는 강경과 논산시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멀리는 서천과 한산과 같은 금강 하류의 사람들도 세도나루를 이용하였다. 대포구인 강경장이나 논산장, 그리고 한산장을 연결하는 길목에 세도나루가 있었다. 세도나루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많은 주민과 보부상이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인근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강을 건너기 위하여 부여뿐만 아니라 논산, 서천 사람들이 세도나루로 몰려들었다. 부여에서는 주로 땔나무, 가축, 쌀, 채소, 과일 등을 싣고 세도나루를 건너서 강경장에 갔다. 한산장이 서면 모시장수들이 세도나루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또한 강경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세도나루가 북새통이었다. 그만큼 세도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세도나루를 관리하기 위하여 부여군에서는 1950년 후반부터 직원 6명을 나루에 배치하였다. 나룻배 관리를 위하여 선장 1명, 매표 직원 2명, 사공 3명이 있었다. 사공은 대체로 그날그날 품삯을 받는 사람들로, 세도면 부근 마을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였다고 한다. 세도나루는 규암나루보다 많은 나룻배 3척을 운항하였다. 2척은 120~130명이 탈 수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너우기배’였으며, 나머지 1척은 돛대를 달 수 있는 황포돛배였다. 그러나 황포돛배는 평소에는 돛을 사용하지 않고 가끔 원거리 운항을 할 때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소규모의 거룻배가 있었는데, 10명 남짓 승선하였고 나루를 건너는 인원이 적은 새벽이나 한밤중에 운항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면 세도나루에도 동력선이 도입되었다. 세도나루가 없어지기 직전까지 차량을 싣는 차도선과 사람을 태우는 동력선이 각각 1척씩 운항하였다. 그러나 1987년 세도와 강경을 연결하는 황산대교가 건설되면서 더 이상 세도나루는 이용할 필요가 사라졌다. 세도나루는 전통 시대 이래 임천 지역과 강경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었으나 이제 그 자리는 황산대교가 대신하게 되었고 세도나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백마강 나루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
백마강은 부여군을 지나는 금강의 별칭이다. ‘백마’라는 이름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사비성을 침략하였을 때 백마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또는 ‘백마’라는 이름이 큰 강이라는 뜻이며, 소정방의 용 낚시설은 백제 역사의 왜곡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만큼 백마강은 백제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백마강 연안에 있는 나루 또한 백제가 금강을 통하여 여러 곳으로 뻗어 나간 밑거름이 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마강 연안의 나루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기능과 역할 또한 더욱 명확해지면서 강화되었다. 금강의 수운이 조선 후기 이래 활성화되면서 내륙 깊이 물류가 이동되었고, 더불어 교통의 발달과 함께 나루는 점차 기착과 종착의 역할을 하였다. 나루 인근은 유입된 물자와 장시를 이루는 사람들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 부여의 경우 저산팔읍의 모시 생산과 유통권 안에 들게 되었다. 부여 각 지역의 오일장은 백마강의 여러 나루를 통하여 금강 수운을 활용하여 상업 발달의 조건을 갖추었다. 서해안 지역의 대포구인 강경장이 세도나루와 연결되면서 백마강 연안 지역의 장시가 더욱 활성화된 것도 모두 나루가 발달한 덕분이었다.
백마강 나루에는 지금도 오랜 자치 관행이 존재한다. 지역 공동체 내부에서 백마강 나루의 지속성을 확인해 준 요인이다. 이러한 자치 관행은 나루를 과거의 흔적으로 남은 역사가 아닌 살아 있는 무형유산으로 남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규암나루의 초파일 관등놀이는 1950년 백제문화제의 성립에 영감을 준 지역 놀이다. 특히 백마강에서 진행되는 수륙재의 전통은 규암나루에서 진행된 관등놀이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백마강 지역의 놀이 문화의 유사성이 나루를 매개로 남아 있던 것이다. 나루와 관련된 무형유산으로는 나룻배를 새로 건조할 때 베푸는 진수식을 비롯하여, 정월대보름에 지내는 무사고를 기원하는 나루고사나 유왕제, 뱃고사 등을 들 수 있다.
백마강에 존재하던 여러 나루는 1970~1980년대가 되면 육로를 중심으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백제대교와 황산대교와 같은 교량의 건설로 사실상 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남아 있던 나루터는 제방의 건설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루 근처에 있던 정자와 고목도 흔적만 남아 나루였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규암나루는 부여를 찾는 관광객을 위한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양화나루는 서천 신성리 갈대밭을 오가는 황포돛배가 복원되어 나루를 이용한 옛 추억을 상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