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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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佳中里 山二十九-二十三 遺蹟 |
영어공식명칭 | Gajung-li Buy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 산29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성수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8월~2004년 12월 - 가중리 산29-23 유적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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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가중리 산29-23 유적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 산29 일원 |
성격 | 생활 유적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 있는 원삼국 시대 생활 유적.
[개설]
가중리 산29-23 유적(佳中里 山29-23 遺蹟)은 부여군 은산 우회 도로 건설 공사에 따른 구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2004년 8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충청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1기, 석개토광묘 3기, 원삼국 시대 주거지 13기가 확인되었다.
[위치]
가중리 산29-23 유적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 산29번지 일원에 있다. 남쪽에 있는 높이 150m의 야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높이 70m 내외의 산 남사면에 조성되어 있다.
[형태]
가중리 산29-23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지 1호는 말각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312㎝, 잔존 길이 132㎝이다. 청동기 시대 유구는 역삼동·흔암리 유형으로 구분되며, 출토 유물은 구순각목공열토기 아가리편, 민무늬토기 저부편이 있다. 조영 시기는 기원전 10~9세기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석개토광묘는 3기가 확인된다. 1호 석개토광묘 남서쪽으로 2호 석개토광묘가 바로 인접하여 있으며, 남쪽으로 약 1m 정도 거리를 두고 3호 석개토광묘와 원삼국 시대 2호 주거지가 있다. 1호는 뚜껑돌을 갖추고 2단의 토광 안에 축조된 석개토광묘로, 조사 지역 내 남동사면 상단부에 있으며 높이 67m 정도에 해당한다. 뚜껑돌의 크기는 길이 40~52㎝, 너비 22~46㎝, 두께 7~9㎝ 정도인 판석(板石) 2매가 나란히 토광 대부분을 덮고 있으며, 길이 15㎝, 너비 10㎝, 두께 4㎝ 내외 규모의 작은 판석 4매로 틈새를 보강하였다. 묘광(墓壙)은 갈색의 사질 점토(沙質粘土)에 2단 굴광(掘廣)하였다. 규모는 1단의 경우 장축 100㎝, 단축 65㎝, 깊이 16㎝ 정도이며, 2단은 장축 62㎝, 단축 34㎝, 깊이 14㎝ 정도이다. 묘광은 장타원형(長楕圓形)이며, 단면은 수직에 가깝게 굴광되었다.
2호는 뚜껑돌을 갖추고 1단의 토광 안에 축조된 석개토광묘로, 조사 지역 내 남동사면 상단부에 있으며 높이 67m 정도에 해당한다. 뚜껑돌은 길이 17~50㎝, 너비 12~21㎝, 두께 4~6㎝인 판석 3매가 비교적 나란히 토광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묘광은 갈색 사질 점토에 1단 굴광하고 조영하였으며, 규모는 길이 장축 71㎝, 단축 44㎝, 깊이 23㎝이다. 묘광은 장타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3호는 뚜껑돌을 갖추고 1단의 토광 안에 축조된 석개토광묘로, 조사 지역 내 남동사면 상단부에 있으며 높이 66m 정도에 해당한다. 뚜껑돌은 길이 27~56㎝, 너비 19~27㎝, 두께 4~6㎝ 규모의 판석 4매가 나란히 토광의 대부분을 덮고 있으며, 틈새를 작은 깬돌로 보강하였다. 규모는 갈색 사질 점토에 1단 굴광하였으며, 규모는 장축 75㎝, 단축 25㎝, 깊이 17㎝이다. 석개토광묘 3기 모두 바닥면에서는 아무런 시설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원삼국 시대 주거지는 13기가 확인되며, 8호에서는 부뚜막 시설이 확인되고, 9호에서는 노지가 확인되었다. 말각방형의 형태이며, 출토 유물로는 원저단경호, 장란형토기, 자배기, 깊은바리토기, 동이, 주구부토기, 두귀달린항아리, 가락바퀴, 쇠뿔잡이가 있다. 조영 시기는 3~4세기로 비정하고 있다.
[현황]
가중리 산29-23 유적에는 현재 은산 우회 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가중리 산29-23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기의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주거지와 유물이 확인되어 청동기 시대 전기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원삼국 시대 주거지의 경우에도 군립을 이루는 사례가 확인되어 원삼국 시기 주거지 및 생활상 연구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