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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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南城洞馬山浦船艙-東-西掘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25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헌섭 |
소재지 | 마산 남성동 마산포 선창 및 동·서 굴강 터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254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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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선창 및 굴강 터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있는 조선 시대 마산포의 선창(船艙) 및 동·서 굴강 터.
[개설]
조선 시대 마산포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매립되기 전까지 서성 선창·백일세 선창·어선창·오산 선창 등 네 개의 선창과 동굴강 및 서굴강이 있었다.
[변천]
마산포가 처음 기록에 등장한 것은 1425년(세종 7)에 완성된 『경상도 지리지』로, “우도(右道) 내상(內廂)은 창원부에 있다. 해구인 마산포(馬山浦)에서 4리 317보[약 1.6㎞] 떨어져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거리를 잰 기점이 된 우도 내상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지금의 합포성이다. 그 즈음의 사실을 기록한 『세종 실록』 10년(1428) 8월 10일 기사에는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시대에 편찬된 지지 등에 마산포가 등장한다.
마산포는 마산창의 세곡 운송을 위해 배가 드나들던 포구로서 조창이 운영되던 시절에는 배를 대는 선창과 배의 수리와 군선 등의 정박을 위해 둔 굴강(掘江) 2개소를 갖추고 있었다. 굴강은 배를 댈 수 있도록 해안을 정비하고 그 바깥에 파도를 막을 수 있도록 돌을 쌓은 시설이다. 마산포의 굴강은 배후에 있는 조창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고려 말엽에 회원창(會原倉)이라고도 불렸던 마산창과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1910년의 토지 이용도를 보면 마산창의 바로 남쪽에 서굴강이 있는데, 모가 죽은 장방형으로 정연하게 그 흔적이 남았다. 그 서쪽에 있는 백일세 선창과 어선창 사이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동굴강이 있다.
선창은 배를 대고 사람이나 짐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둔 시설로 보통 잔교(棧橋) 또는 배다리의 형태로 운용되었다. 1910년의 토지 이용도에서 선창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마산포에 딸린 4개소의 선창은 지적도에 표시될 정도로 반영구적인 시설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산천조에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다.”고 나온다. 『여지도서』 경상도 김해진관 창원 대도호부에는 “마산포는 관아의 서쪽 20리[약 8㎞]에 있다.”고 했다. 『여지도서』가 가리키는 지역은 지금의 어시장 일원인데, 『경상도 지리지』의 기록으로는 지금의 어린교 부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 기록에 다소 차이가 있다.
[현황]
마산포 개항 이래 선창과 동·서 굴강 자리는 지속적으로 매립되어 남성동 조창과 이어지는 곳은 도시화되었고, 지금의 국도 14호선 남쪽은 어시장이 들어서면서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