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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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屬活字本-直指-誕生地-淸州古印刷博物館 |
영어의미역 | Cheongju Early Printing Museum Built on the Birthplace of Jikji, the World's Oldest Remaining Material Printed by Movable Metal Types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직지대로 71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일 |
설립연도/일시 | 1992년 3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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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 충청북도 |
홈페이지 | 청주고인쇄박물관(http://www.jikjiworld.net) |
[정의]
현존하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인쇄된 흥덕사 절터와 고인쇄문화의 종합박물관
[개관]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양병산 기슭에 위치하는 흥덕사는 고려 우왕 3년(1377)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를 비롯하여『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등을 금속활자로 간행한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중흥처이다.
흥덕사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흥덕사의 자취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도 전무하였다. 이러한 흥덕사라는 절이 다만 청주 부근에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직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직지』 하권의 맨 끝장에 ‘선광칠년정사칠월 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간기에서 청주의 흥덕사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였고, 이후 1985년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흥덕사명 청동금구(興德寺銘靑銅禁口)’와 ‘황통십년 흥덕사명 청동불발(皇統十年興德寺銘靑銅佛鉢)’로 흥덕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에는 금당이 복원되어 있고, 남쪽으로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을 간행한 곳으로써의 위상을 높이며, 후대에 한국의 고인쇄출판문화의 발달사를 익히고 이에 대한 식견을 높이는 과학교육의 장과 세계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증진시키고 21세기 정보문화산업의 중심메카로 활용되고 있다.
[청주 흥덕사지의 발굴]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가 속해있는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는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가 꽃피웠던 곳으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사지도 있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는 1984년에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에서 운천지구 택지개발공사의 일원으로 실시하였던 운천동사지(雲泉洞寺址)의 발굴조사를 맡고 있던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학예연구실장인 박상일에 의하여 처음 확인된 곳이다. 이곳에서 치미편 및 연화문과 당초문이 새겨진 와편이 수습되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낸 것이다. 이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현지조사와 평판측량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택지개발사업지구 내에 포함되어 있는 사지에 적절한 보존조치와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에서는 택지개발을 위한 공사를 그대로 진행 하였고, 더욱이 당시에는 확실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금당지 유구 등이 훼손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이곳에서 반출된 흙으로 조성한 택지에서 1985년 3월에는 한 개인이 청동금구 1점을 습득하여 골동품상에 팔아넘겼다가 며칠 뒤에 국고에 회수되는 사례도 있었고,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종종 반출된 흙에서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85년 7월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시작된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발굴조사는 훼손되지 않고 잔존하는 서반부 지역을 대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사지의 발굴 결과 이곳에 있었던 사찰은 대략 9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 말 또는 15세기 초까지 존속하였으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후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지의 동반부가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유구는 동남쪽 일부가 손상된 금당지와 동벽부가 유실된 강당지, 그리고 원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회랑지와 회랑지 끝에 붙은 벽돌 깔은 건물지 등 주로 사역권의 서북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지의 성격상 좌우대칭으로 건물배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동남부 지역에도 같은 구조의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일단 추정하였다. 따라서 가람배치는 남향의 단탑가람으로서 중심축선상의 중문·탑·금당·강당이 있고, 좌우로 동·서회랑이 돌려진 삼국시대 이래의 통식을 따랐으며, 각 건물들은 후대에 중수를 거듭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굴조사는 사지의 유구를 조사하여 사찰의 원상을 밝히는 것과 함께 출토유물을 통하여 잃어버린 절의 이름을 찾는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이 사지는 일명사지(逸名寺址)였기 때문에 옛 지명을 따서 연당리사지로 가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발굴조사가 거의 끝나고 주변을 정리하던 중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座)’라고 음각된 청동금구 파편이 발견 수습되었다. 이 명문은 『직지』 하권 끝장의 ‘선광칠년정사칠월 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간기의 ‘흥덕사’라는 사명(寺名)과 일치하고, ‘서원부’와 ‘청주목’이 동일한 지명이므로 이 사지가 흥덕사지(興德寺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이곳이 고려 우왕 3년(1377)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를 인쇄한 곳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로써 문화공보부에서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문화재위원을 파견하여 사지와 유물을 확인한 후 1986년에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10,711평을 사적 제315호로 지정공고 하였다.
이후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조사에서 청동보당용두(靑銅寶幢龍頭) 2점과 청동불발(靑銅佛鉢) 등 여러 점의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중 청동불발에는 “皇統十年庚午四月日興德寺依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盒具鈒雲口入重二斤二兩印 (황통십년경오사월 일 흥덕사의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불발일합구삽운구입중이근이량인)”’이라는 음각의 명문이 있어서 이곳이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그 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금당과 3층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를 하였다.
[청주 흥덕사지의 유적]
발굴 당시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는 이미 동반부가 파괴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 연유로 완전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좌우대칭적인 사찰의 가람배치를 생각하여 청주 흥덕사지의 가람배치는 남향의 중심축에 중문·탑·금당·강당을 세우고 그 둘레에 회랑을 두르는 통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며, 후대에 약간의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지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측면의 중앙 칸이 다른 칸보다 넓은 편이다. 기단은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이며, 원형초석과 방형초석의 제작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고, 남면 2열에 남아있는 방형의 냇돌 적심은 경주 황룡사지의 적심과 유사하다. 그러나 금당건물은 통일신라 초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의 서북면에서 불에 탄 토층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고, 북면에서는 처마 끝선과 일치되는 부분에 막새기와들이 내려 앉아 있었으며, 치미도 이 부분에서 발견된 사실로 보아 금당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당시 동쪽과 남쪽 끝이 파괴된 상태여서 그 원형을 알 수는 없으나 북면과 서면의 남아있는 것을 토대로 건물의 형태를 복원하였다.
강당지는 금당지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있으나 금당지보다 낮은 지대에 있다. 현재는 남쪽 기단석렬과 적심석의 일부만 남아 있어 건물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며, 서편으로는 다른 건물지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어 현재의 강당지 유구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확인되며, 고려시대에 중창될 때 재건축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회랑지는 현재 대부분의 기단석과 초석이 남아 있어 건물형태를 알려주고 있는데, 13칸의 단칸 회랑이며 금당지와 연결되는 익랑은 보이지 않는다. ‘계향지사(桂香之寺)’와 ‘대중삼년(大中三年)’의 명문 와편이 이 서회랑 바닥의 고막이돌 사이에서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노출된 기단의 바닥층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석들 사이에 벽을 쌓았던 사실을 나타내는 고막이돌이 열을 이루며 잘 남아 있어, 후대에는 회랑지가 승방 등으로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강당지 서편에 용도가 분명하지 않은 작은 건물지가 거의 완형으로 발굴되었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이며, 바닥에 전(塼)을 깔은 이 건물지는 강당지보다 약간 높고 초석과 적심의 형태가 달라 강당이나 서회랑과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지로 보인다. 이 건물지의 형태나 출토 유물의 문양이 다른 점으로 미루어 금당이나 서회랑과는 다른 후대의 건물로 확인되며 인쇄와 관련한 공방이나, 기타 경판을 보관했던 경판각(經版閣)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주 흥덕사지의 유물]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출토유물은 크게 와전류와 금속류로 구분할 수 있다. 와전류는 수막새·암막새·치미 등이 있다. 수막새는 연화문 또는 연화문과 당초문이 복합 시문된 것이 가장 많으며 문양의 형태가 다양하여 누차 중수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일부의 수막새는 신라말기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어 흥덕사의 상한연대를 추정하게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인 해무리문과 귀면문이 있는 수막새도 출토되었다. 암막새는 주연부에 연주문이 조출된 당초문이 주류를 이루고,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연꽃잎이 밑으로 향해있는 연화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명문와편으로는 ‘계향지사(桂香之寺)’와 ‘대중삼년(大中三年)’명 기와가 주목된다. 치미는 파편을 원형복원한 것으로 전체적인 모양은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같은 기본형으로 고려시대의 치미로써는 유일한 완형이고, 규모면에서 황룡사지 치미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금속류는 금구 3점을 비롯하여 청동제 소종·금강저·보당용두·불기·발 등이 있다. 특히 ‘흥덕사’명 금구와 ‘황통십년’명 불발은 이 사지의 이름을 알려준 귀중한 유물이다. 이외에도 금당지에서 철불의 나발 파편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밖에 자기와 토기편이 있다. 많이 출토된 것은 아니지만 해무리형의 굽이 달린 고려초기의 청자편과 물고기를 백상감으로 표현한 분청사기 조각들이 보여 당시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1. 흥덕사(興德寺)명 금구
발굴당시 사지의 동쪽 훼손부분에서 수습된 것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조각을 합하면 측면에 “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 改造入重參拾貳斤印(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 개조입중삼십이근인)”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일부 파손이 있어 금구의 전면과 후면이 불분명하나 각기 다른 면에 당초문과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고, 명문은 측면에 양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화문과 당초문의 문양이나 서원부라는 지명에서 볼 때, 금구의 제작연대에 해당되는 ‘갑인년’은 고려 광종 5년(954)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이 사지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곳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가 만들어진 곳임을 증명하게 된 중요한 자료이다.
2. 황통십년 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명 청동불발
얇은 동판으로 만든 것으로 전체 모양은 복발 모양이고 구연부를 직립시켰다. 이 구연부에 “皇統十年庚午四月日興德寺依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盒具鈒雲入重二斤六兩印(황통십년경오사월 일 흥덕사의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불발일합구삽운입중이근육량인)”이라는 음각의 명문이 있다. 이중 ‘황통십년경오’는 고려 의종 4년(1150)에 해당되어 이 일대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추정은 물론 이 불발이 흥덕사에서 사용되었던 것이고, 또 이 사지가 바로 흥덕사의 유지임을 재확인 시켜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 유물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
1985년 10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가 발굴조사 되고 이곳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직지』가 인쇄되었음이 확인됨으로써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의 사적지 지정과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 건립을 건의하였다. 이에 충청북도에서는 조례를 제정하여 1990년 7월 10일에 흥덕사지 관리사무소를 설치하는 한편 박물관 건립을 시작하여 1992년 3월 17일에 드디어 개관하게 되었다. 그 후 1994년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관리가 충청북도에서 청주시로 이관되었고, 2000년 6월 20일에 전시실을 증축 개관하였으며, 2001년 9월 4일에는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를 계기로 2004년 4월 28일에는 유네스코 직지상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소장자료는 1,062종 2,161점이며, 고서가 1,734점, 인쇄기구 61점,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출토유물 65점 기타 301점이다.
주요 업무는 청주 흥덕사지(興德寺址) 관리 및 보존, 고인쇄문화와 관련된 전시 조사 연구 활동을 비롯하여 자료의 영인 및 발간사업을 주로 하고 있다. 그리고『직지』를 세계에 알리고 시민에 홍보하기 위하여 『직지』 찾기 운동을 지원하고 직지 찾기 국제 사이클 대회, 직지 찾기 인라인스케이트 대회, 직지 콜 센터 운영, 직지홍보관 설치 운영 등 각종 행사를 직접 주관 또는 지원하고 있으며, 이밖에『직지』 및 고인쇄문화와 관련된 학술대회와 특별전시 및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외국에서의 기회전 등을 꾸준히 개최하여 전국 최우수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와 흥덕사실, 직지금속활자 공방 재현관, 인쇄문화실, 동서양 인쇄문화비교실 등을 갖추고 있는데, 우선 흥덕사실에는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 터임을 알게 해준 금구와 불발을 비롯하여 청동소종, 금강저, 와당, 철불 나발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세계인쇄문화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연표가 있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금속활자 재현관은 『직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금속활자 인쇄과정을 7단계로 나누어 보여준다. 각 단계별로 이동하면 자동으로 인형들이 움직이면서 금속활자 제작과정을 설명하여 준다.
인쇄문화실에는 인쇄의 시작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을 시대별 주제별로 전시하여 우리나라 인쇄발달사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시대 인쇄문화 구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구역에서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당대에 간행된 책과 해인사 『팔만대장경』 등 인쇄문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구역에서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여러 가지 금속활자를 볼 수 있다. 동서양 인쇄문화 비교실에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와 문방사우 등 동·서양의 인쇄문화 비교 및 미래를 조명하고 있으며, 한지의 제조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의 개관시간은 3월부터 10월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표마감시간은 오후 5시이다. 11월부터 2월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매표마감 시간은 오후 4시이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날은 휴관한다. 입장료는 어른은 800원, 청소년은 600원, 어린이는 400원이며, 6세 이하 어린이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은 무료이다. 초, 중, 고등학생 20명 이상의 단체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관람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