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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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道長 |
영어음역 | Yi Dojang |
이칭/별칭 | 태시(泰始),낙촌(洛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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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성별 | 남 |
생년 | 1603년 |
몰년 | 1644년 |
본관 | 광주 |
대표관직 | 응교(應敎) |
[정의]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이당(李唐)의 차자 이집(李集)을 일대(一代)로 하고 좌통례공 이극견의 차자 승사랑 이지(李摯)를 칠곡 입향조로 하는 광주이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인데 출계(出系)하여 주부(主簿) 이영우(李榮雨)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어머니는 인천채씨, 부인은 안동김씨이다.
[활동사항]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출신으로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식견(識見)이 두루 미치고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넓고 행실이 반듯했다. 1630년(인조 8)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한주(翰注)·전랑(銓郞)·삼사(三司)를 두루 지냈다. 병자호란 때 사관(史官)으로서 어가를 따랐으며 또한 치욕적인 강화체결(講和締結) 때 청나라에서 척화 주장자(斥和主張者)의 명단을 요구하자 척화 주장자로 이름이 드러난 삼학사(三學士)의 이름만 쓰고 붓을 놓으며 “적(敵)의 요구는 사람 수를 정한 바 없는데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을 올려 희생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많은 인명을 구하셨다. 벼슬은 응교에 이르렀으며 1644년(인조 22)에 향년 42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야가 모두 애석해 했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저술 및 작품]
『낙촌집(洛村集)』과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