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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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陽來 |
영어음역 | Jo Yangnae |
이칭/별칭 | 양래(陽來),서규(瑞圭),복초(復初),양졸재(養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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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
성별 | 남 |
생년 | 1752년 |
몰년 | 1804년 |
본관 | 한양 |
[정의]
조선 후기 칠곡에서 활동한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초명은 조양래(趙陽來), 개명(改名)은 조서규(趙瑞圭), 자는 복초(復初), 호는 양졸재(養拙齋)이다. 덕원부(德原府) 용진현(龍津縣)에서 세거한 사족의 후손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한성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창하자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형 조범(趙範)과 함께 성주로 유배되었다. 형은 도중에 자결하고 혼자 성주에 은거하면서 장가를 들어 처가가 있는 왜관읍 금산리[야드기]에 정착하였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여 석적읍 포남리를 중심으로 20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매설당 조완규(趙完珪)의 후손으로 조영기(趙永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일선김씨이고 부인은 선산곽씨이다.
[활동사항]
타고난 자질이 고결하였으며 효성과 우애, 온아함이 있었으며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였고 더욱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세인들이 ‘소강절(邵康節)[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이라 불렀다. 시집 한 권이 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하당(荷塘) 조종필(趙鍾弼)이 행장과 비문을 짓고, 과재(果齋) 장석개(張錫蓋)가 묘지(墓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