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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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慧星團 |
영어의미역 | Hyeseongdan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칠곡 지역 출신 인물들이 활동한 학생 항일 비밀결사.
[개설]
혜성단(彗星團)은 1919년 4월 1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칠곡 출신의 이영옥, 이명건, 이수건 등이 참여한 비밀결사이다. 혜성단은 1919년 3월 8일부터 전개된 대구의 만세시위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지방으로 확대되어 가는 1919년 4월에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김수길(金壽吉) 등 학생층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혜성단의 만세시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지만, 각종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인쇄·배포하여 각계각층에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활동사항]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대구 지역에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3월 8일과 10일에 2차례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대구고보(大邱高普)·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계성학교(啓聖學校) 등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시내에는 일본군 보병 80연대가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이후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전개되어 만세시위는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을 비롯한 권성우(權聖佑)·이종식(李鍾植)[대구]·이영식(李永植)[성주]·이영옥(李榮玉)[칠곡]·이명건(李命健)[칠곡]·최재화(崔載華)[선산]·허성도(許聖徒)[영덕]·이기명(李基明)[의성]·박제원(朴齊元)·이종헌(李鍾憲)[대구]·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鍵)[칠곡] 등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대구 시내 조선인 상인들에게 300매의 「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을 발송하여 서문 밖 시장의 약 80호 상가의 폐점 철시를 유도하였고, 4월 6일에 대구경찰서장 시라이요시사부로(白井義三郞)에게 「암살협박문(暗殺脅迫文)」, 김천의 안동규(安東奎)에게 「독립운동자금보조요구탄원서(獨立運動資金補助要求歎願書)」, 자제회(自制會) 가입을 강권하는 한국인 관리에게 「암살협박문(暗殺脅迫文)」 등을 발송하였다.
1919년 4월 17일에 김수길·이영식 등은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혜성단을 조직하였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 경성과 만주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인쇄책으로 최재화·김수길, 인쇄물 배달책으로 허성도·이덕생·이종식·이종헌·이기명, 출납책으로 이수건, 만주출장책으로 이영옥, 연락책으로 이명건 등, 각 부서를 정하고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혜성단은 4월 18일에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에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에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의 헌금을 호소하였다. 혜성단의 목적과 행동 방략은 출판물을 배부하여 독립심을 고취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즉 일반 민중은 물론이고 조선인 관공리에게 경고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각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요구하며, 상인들에게는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를 요구하였다. 혜성단은 최후의 독립 달성은 내·외가 상응해야하므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고자 하였다. 일본 군경(軍警)의 감시망에 걸린 혜성단은 5월 중순경까지 주동 인물들이 차례로 검거되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 결과 김수길은 징역 4년, 이종식·이영옥·이명건은 징역 3년, 이영식은 징역 1년, 권성우는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혜성단은 대구 지역의 학생들이 주축이 된 비밀결사로서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중앙 및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혜성단은 3·1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매우 주목되는 비밀결사 조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