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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969
한자 李快大
영어음역 Yi Kwaed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현대 화가
출신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39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13년연표보기
몰년 1987년 사망 추정연표보기
본관 경주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군 지천면 출신의 월북 화가.

[개설]

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의 웃갓마을 39번지에서 출생했다. 대한제국 시절에 창원 고을 원(員)을 지낸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李敬玉)과 어머니 윤경열 사이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쾌대는 신동소학교에 입학했다가 대구 수창보통학교에 전학·졸업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장발 교사에게 미술을 배운 후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화단에 데뷔한 때는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32년이었고,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했다.

이쾌대의 그림은 표현 기법이 참신성이 있고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는 화풍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월북 후인 1947년에 북한 미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을 통해 나름대로의 자주성을 보였으나, 1960년대 이후 북한 사회주의의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체미술’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민족허무주의’라는 명목으로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청된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하여 살다가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쾌대의 작품은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활동사항]

1941년에 일본 동경에서 이중섭(李仲燮), 문학수, 김만형,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활동을 전개했고 여러 번 회원전을 가졌다. 광복 이후에는 좌익미술단체에 참여했으며 김인승(金仁承), 남관(南寬) 등과 함께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여 4회의 회원전을 열기도 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다가 포로가 되었고 포로 교환 때 월북하였다.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화가들의 작품들이 해금 조치되어 이쾌대의 작품도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후 ‘해금작가 유화전’, ‘월북화가 이쾌대전’, ‘이쾌대 순회전’, ‘광주비엔날레초대전’ 등으로 작품이 전시되었고 유화의 한국적 수용과 정착이라는 리얼리즘 미술의 정통성이 인정되어 한국근대미술가 10인에 선정되었다.

[저술 및 작품]

대표적 작품으로는 「군상(群像)」이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공모전에 입선된 「운명」, 3회전에 출품한 「부인도」, 「탁자 위의 정물」, 정체 모를 군용기에 독도 어민들이 무차별 살상 당한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조난」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무희의 휴식」, 「봉숭아」, 「걸인」, 「나부」, 「상황」, 「첼로연주자」 등의 작품이 있다. 이쾌대의 작품은 월북한 후 남쪽에 남아있던 아내 유갑봉이 긴 세월 동안 간직하였다가 공개함으로서 작품의 진면목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부인 유갑봉은 1981년 향년 67세로 작고했다.

[상훈과 추모]

1928년에 제11회 「정물」 입선, 1932년에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회화부 2등상 수상, 1935년에 제5회 녹포사전 「무희의 휴식」 입선 등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윤** 안녕하세요 .!
저는 하남시에서 사는윤금석이란 사람입니다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면서 최고의작가 이쾌대 선생님을 알게되였습니다
어느 작가보다도 선생님에 작품에서는 세게적인 명화급에 작품들이죠
어느 분이 이글을읽으실지 모르지만 저의 블러그에 오셔서 이쾌대 선생님에 작품명
고향떠나는사람들 625 한번보십시요 변형 100호입니다
정말 명화입니다 참고해주십시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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