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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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의미역 | Roman Catholic |
이칭/별칭 | 가톨릭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집필자 | 장영복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여러 종교들 중 하나로서 개신교와 대비하는 구교(舊敎).
[개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라고도 한다. 여기서 ‘천주’라는 말은 ‘하느님’을 뜻하고, 가톨릭은 ‘보편적인’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카토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보편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계 60억 인구대비 종교인 비율은 대략적으로 이슬람교가 11억 6천5백만 명, 천주교(가톨릭) 10억 3천만 명, 힌두교 7억 6천5백만 명, 불교 3억 5천4백만 명, 기독교(개신교-3천여개 교파) 3억 1천6백만 명, 정교회 2억 1천4백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이슬람교는 국교이기 때문에 국민 인구와 신자 수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세계적으로 천주교(가톨릭) 신자 수가 타종교에 비해 월등히 높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831년(순조 31)에 조선교구가 중국 북경교구에서 분리되어 독립 교구가 되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학으로서 전래 되었다. 더욱이 그것은 서양 문물이 전래된 경우와 같이 북경을 통해 사신의 교류로 전래되었기에 주로 학자들의 호기심이나 학문으로서 연구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 불렀다. 주로 당시의 정권에서 물러난 남인학자들에 의해서 서학 연구가 진전됨으로서 점차 신앙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경상도 지방에서의 천주교는 1785년(정조 9)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 사건 이후 밀양 단양으로 귀양 온 김범우(金範禹)와 상주로 은거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하여 전파되었다고 한다. 칠곡 지방의 천주교는 왜관 달오[현 왜관읍 왜관리]에 살았던 성섭(成涉)[1718~1788]이 실학을 연구 하다가 신자가 되었다고 하므로, 1784년에 한국천주교 초창기부터 포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15년(순조 15), 청송에 살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형을 당할 때, 가족들이 칠곡 지천면 신나무골과 동명면 한티에 숨어 살아 이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이후 활발한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60년(철종 11)에 검거령이 내려지자, 신자들이 대구 죽전 등으로 흩어졌다. 1886년(고종 23) 한불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신나무골과 한티마을을 중심으로 다시 선교 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1894년(고종 31)에 낙산에 가실성당, 1928년에는 왜관성당이 설립되었고, 1952년부터 성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에서 칠곡군, 성주군, 금능군, 상주군, 문경군 등 6개 군 본당을 사목하게 됨으로써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현재 칠곡 지역 천주교회는 왜관·가실·석전·약목·신동·동명·인평·중리 성당 등 8개 성당이 있으며, 이 중 수도원 소속 신부들이 사목하는 성당은 왜관·가실·석전·약목·신동 성당 등 5곳이고, 동명·인평·중리 성당은 대구대교구에서 직접 사목하고 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한국 베네딕토 수도원은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09년 독일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수도원으로부터 5명의 수도자가 서울에 파견되어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고, 1927년 이후부터는 북한 함경도 성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중국 성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 중심으로 본당 사목, 신학교육, 출판사업, 사회사업 등으로 수도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해방 후 38선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수도원이 폐쇄 당하고, 6·25전쟁을 전후하여 70여 회원들이 체포·구금되어 30여 회원이 피살되거나 4여년 강제수용소 생활 도중 옥사하였다. 1952년에 덕원과 연길수도원에서 피난 온 회원들이 다시 모여 자리 잡은 곳이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현재 140여 회원 중 70여명이 본원이 있는 왜관을 중심으로 순심남·여 중·고등학교 등 교육 사업과 출판업, 인쇄업, 유리 화공예실, 시청각 연구회, 목공소, 농장경영, 금속 공예실, 두 곳의 양로원 등을 운영하고, 왜관, 석전, 가실, 약목, 신동 성당과 대구 대명성당 등 여섯 곳의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나머지 70여 회원은 서울·부산·대구·남양주·화순 및 미국 뉴저지 등지에 분원 및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 뉴저지 수도원은 8명의 한국 회원이 파견되어 있다. 남양주의 성 요셉 수도원은 1998년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2006년 전라남도 화순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신나무골 성지]
조선 천주교 100년 박해 중 1815년의 을해박해를 전후하여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영양의 일월산에 우거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될 때, 신자들이 흩어지면서 신나무골을 찾았다. 이곳이 훗날 천주교 대구교구가 움튼 요람지가 되었다. 한편 103위 순교 성인 중 홍병주[베드로], 홍여주[바오로] 형제가 여기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가 1839년 을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1849년부터 1861년까지 12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 할 때도 이곳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으며, 이후 다블뤼 주교, 리델 신부도 성사를 주었다. 이로써 신나무골 신자촌은 지방의 신자와 외지에서 모인 신자들로서 큰 신자촌을 이루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한티로 피난 갔다가 1868년 한티에서 30여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리하여 신나무골은 대구를 위시하여 인근 본당 발전의 요람지로서 1977년에 1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한티 성지]
동명면 득명리에서 군위군 부계면으로 넘어가는 큰 재를 한티라 한다. 해발 600m의 궁핍한 벽지인 한 산골인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신나무골과 같이 청송, 진보, 영양 등지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고 문초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신나무골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이곳 한티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움막집에 살던 이들은 신나무골 공소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신앙생활을 했고,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와 1849년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를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862년에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보고서에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작고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한티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한티의 치명자로는 배씨 문중의 배정모[손아]의 부인 이선이 외 그의 장남 배도령, 서씨 문중 서익순과 서태순, 조까를로 집안 등으로 현재 이들과 그 외에 병인교난을 전후해 치명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