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39 |
---|---|
한자 | 水安保戰鬪 |
영어의미역 | Suanbo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헌주 |
[정의]
1896년 3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에서 제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역사적 배경]
1895년 8월 20일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데 이어 친일내각에 의해 1895년 말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기 의병을 대표하는 제천 의병의 항쟁도 이루어졌다.
[경과]
수안보로 이동한 이강년 부대는 3월 19일 첫 교전을 벌여 일본군 두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뒤 충주 동창에 머물며 수안보 공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영남 지역으로 가서 연합 의병을 추진하던 서상렬이 지원을 요청하자 이강년 부대는 수안보의 일본군이 상주 태봉의 일본군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3월 하순에 조령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의 태봉 병참 기지 공격도, 이강년의 조령 통로 차단도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이강년은 홍대석과 연합 작전을 펴서 수안보 공략을 다시 시도하였지만 홍대석이 이끄는 부대가 큰 타격을 입는 등 일본군의 강화된 공세에 밀려 실패하였다.
[결과]
이강년 부대는 수안보 전투가 실패함으로써 제천 본진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자 제천 방어를 위하여 4월 13일 동창으로 물러났고, 4월 20일에는 제천으로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천 의병은 수적인 우위가 있었으나 보유한 총기의 성능이 일본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고, 참호전을 펼치는 일본군에 대한 적절한 대응 전술을 갖지 못했던 점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쌓은 산악 전투 경험은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