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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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이칭/별칭 | 임란,임진란,왜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 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개설]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전쟁을 치렀다.
[역사적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대에 이르러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4대 사화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 간에 계속된 정쟁이 중앙 정계의 혼란을 가져왔고,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는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를 설치하였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조정은 정쟁에 빠져 사태의 위급함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아군의 방어 전략은 먼저 이일(李鎰)이 대구에 집결한 경상도 군사를 지휘하여 일본군 선봉의 북상을 일단 저지한 후, 대치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령 남쪽에 전방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때 신립(申砬)의 주력이 조령의 험난한 산세를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성응길(成應吉)과 조경(趙儆)이 지키는 죽령과 추풍령의 측면 방어선과 연결하여 강력한 주방어선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일의 전방 방어선과 신립의 조령 본진, 도성의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으로 이어지는 종심 방어선을 설치하여 축차 방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전략이었다. 종심 방어의 중심인 조령으로 적을 끌어들이고 요새화한 방어 진지를 활용하여 최대한 적에게 타격을 주며, 아군의 축차 방어에 의해 적의 전술적 기동력을 억제한 뒤 아군이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적의 주력을 섬멸한다는 것이 임진왜란 초기의 방어 전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 침공 명령을 내렸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나고야[名古屋]를 떠난 일본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8,000의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중로(中路)로 진격한 일본군은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경유하여 상주에 이르렀고, 좌로(左路)로 진격한 일본군은 장기·기장을 거쳐 좌병영인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지나 용궁의 하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진출하여 중도의 군사와 합류한 뒤 조령을 넘어 충주로 침입하였다.
[경과]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로,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로로,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로 내려가게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각각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하는 한편,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을 후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구축하려던 상주 방어선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신립이 조령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상주에서 이일의 부대가 와해되었으므로 조령 이남의 전방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신립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따라서 조령 방어 작전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4월 26일 신립은 충주 남쪽 단월역에서 충청도 군사 8,000명과 진을 쳤다. 일본군은 4월 27일 조령을 돌파하고 4월 28일 오전에 단월역에 도착하자 신립은 병사를 이끌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
일본군은 4월 28일 정오 무렵부터 공격 준비를 시작하였다. 병력은 좌익대장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 부대 3,000명, 중앙대장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7,000명, 우익대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대 5,000명, 그리고 예비대장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와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의 부대 3,700명으로 총 18,700명이었다. 일본군 좌익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익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예비대는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탄금대에 진을 친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충주성을 향하여 나아가니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 버렸다. 성 안에서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방을 포위하므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은 김여물(金汝岉)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지키지 못한 실책을 범하였고, 병사들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으며, 장수는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는 장수를 알지 못하는 연대감이 없는 군대로 적의 작전과 전술 및 적정을 모르는 상태였다. 또한 기병이 활동하기 어려운 탄금대 전방 벌판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니, 패하는 전투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전한 여파는 컸다. 4월 29일 충주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인심이 크게 동요하였으며, 위로는 조정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군사와 장교에 이르기까지 도망가서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인경도 치지 않았다. 선조는 동궁과 비빈(妃嬪),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평양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충주 지역에서는 대군(大軍)이 온 것을 믿고 모두 피난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고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충주사고는 소실되어 사고에 보관된 역대 실록과 중요 전적이 불타 버렸으며, 관아와 민가는 초토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 탄금대 전투 이후 조선군은 초전에 무너져 명군(明軍)이 평양을 탈환할 때까지 지리멸렬하였다. 조선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충주에서 패함으로써 충주에서 서울까지 방어할 만한 요해처가 없어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가 파천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