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05 |
---|---|
한자 | 金在魯 |
영어음역 | Gim Jaero |
이칭/별칭 | 중례(仲禮),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 김극형(金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징(金澄), 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이며, 어머니는 돈녕도정을 지낸 이몽석(李夢錫)의 딸이다. 아들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으로 3대 정승에 2대 영상을 배출한 명문이다.
[활동사항]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16년 부수찬 재직 시에는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맹(鄭氓)을 탄핵해 물러나게 하였다. 1719년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재직 시 양안(量案, 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2년 신임사화로 파직된 후 이듬 해 울산으로 귀양 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 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는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의 유봉휘·이광좌(李光佐) 등 5명을 죄 주도록 청하고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무고 사실을 상소해 사형당하게 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으나, 이듬 해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해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녕부사겸수어사(知敦寧府使兼守禦使)를 지냈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해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731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로 목숨을 잃은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을 상소해 이를 성사시켰다. 1740년 처음 영의정에 올랐으며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그외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였으며, 5명의 역안(逆案: 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학문과 사상]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고 예학에 깊었으며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와 『난여(爛餘)』가 있다. 편저로는 『예기보주(禮記補註)』, 『청풍김씨세보(淸風金氏世譜)』, 『좌씨집선속(左氏輯選續)』, 『금석록(金石錄)』, 『경종실록(景宗實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 64-13번지에 있다. 분묘의 형식은 둘레에 호석을 두르고 그 위에 봉사를 덮었으며 묘역의 석물은 돌과 상석을 중심으로 좌측에 비석이 있다. 봉사보다 한층 낮은 제1단에는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을, 망주석 앞 좌우에는 양석을 세웠으며 양석 중간 앞부분에는 장명등을 세웠다.
좌우 망주석을 중심으로 측면과 후면에 곡분을 설치하였다. 묘비의 내용은 “유명조선영의정봉조하시충정김공재노묘 정경부인청송심씨부좌(有明朝鮮領議政奉朝賀謚忠靖沙金公在魯墓 貞敬夫人靑松沈氏駙左)”이며 건립 연대는 “숭정기원후삼신이십월일립(崇禎紀元後三辛已十月日立)”이라 쓰여 있다. 묘갈명은 남유용(南有容)이 썼다.
[상훈과 추모]
봉조하(奉朝賀)로 78세에 죽으니 영조(英祖)가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 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