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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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汝恭 |
영어음역 | Yang Yeogong |
이칭/별칭 | 경지(敬之),유정(柳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현정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경지(敬之), 호는 유정(柳亭). 고려 통합삼한대장군(統合三韓大將軍) 양능길(梁能吉)의 1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무(梁茂)이고, 할아버지는 양환(梁煥), 아버지는 현령 양숙(梁肅)이다. 외할아버지는 윤정신(尹挺莘), 장인은 민사정(閔思正)이다.
[활동사항]
1396년(태조 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05년(태종 5) 28세의 나이로 식년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문장에 능통하여 중시(重試) 때 이조정랑 김자(金赭)가 양여공의 시권(試券)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장원 급제했다고 한다.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성균관주부를 역임하고, 1411년(태종 11) 사간원우정언지제교(司諫院右正言知製敎)를 거쳐 이듬해 황주판관이 되었으며, 이조좌랑, 성균관직강지제교(成均館直講知製敎), 예조정랑을 지냈다.
1418년(세종 즉위년) 병조정랑으로 있으면서 병사(兵事)를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병조판서 박습 등과 함안으로 장배(杖配)되었다. 1431년 충주에 있을 때, 김보중(金寶重)이 유연생(柳衍生)에게서 기생 예성화(芮城花)를 빼앗자 이에 원한을 품은 유연생은 김보중(金寶重)과 양여공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연생을 난언죄(亂言罪)로 사형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433년(세종 15) 병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와 글에 능하였다고 전하는데, 성종 대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촌장에 앓고 누워 유치양에게[病臥村莊 書寄柳致養]」, 「즉사 정 박 부정[卽事呈朴副正]」, 「차운(次韻)」, 「이이립(李而立)의 부친 시에 차운하여[次李而立見寄之韻]」, 「무극계상별이립 이립유시 차운증지(無極溪上別而立 而立有詩 次韻贈之)」 등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산58번지에 있다. 묘역은 약 20평 정도이며 상석과 문인석이 있으나 오래되어 풍화가 심하다. 봉분은 높이 180㎝, 밑변 길이가 620㎝이며 낮게 주저앉은 상태이다. 묘표석은 대리석으로 심하게 풍화되어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봉분의 우측에 묘비가 있는데, 1435년(세종 17) 대제학 윤회가 글을 쓴 묘비가 있었으나 중간에 없어진 것을, 1877년 후손들이 다시 만들어 세웠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생전의 지극한 효행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효행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된 양여공 효자각(孝子閣)이 있다. 양여공 효자각은 1748년(영조 24)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 세워졌는데, 양여공의 후손들이 이주하면서 1808년(순조 8) 살미면 문강리에 중건하였다.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양여공 효자각은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전면에만 홍전(紅箭)을 세우고 편액을 걸었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1단 축조한 기단상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주(圓形柱)를 세웠는데, 공포와 창방을 생략하고 있는, 간결한 납도리 삼량 집으로 홑처마 팔작 지붕을 이루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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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 유연생 관련 사건 서술 오류 수정 | 1431년 충주에 있을 때, 양여공이 유연생(柳衍生)에게서 기생 예성화(芮城花)를 빼앗자, 원한을 품은 유연생이 양여공이 반역을 음모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사형당하였다. -> 1431년 충주에 있을 때, 김보중(金寶重)이 유연생(柳衍生)에게서 기생 예성화(芮城花)를 빼앗자 이에 원한을 품은 유연생은 김보중(金寶重)과 양여공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연생을 난언죄(亂言罪)로 사형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2018.01.02 | 몰년 수정 | 1431(세종 13) -> 1433년(세종 15) 사망 원인 : 병사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