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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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규진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개설]
1910년 8월 한국병합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의 조선 침략이 완성되었다. 일제는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더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1910년 10월부터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식민지 지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정책은 시대에 따라 다소 변동되기는 했으나, 일관되게 시행된 정책도 있었다. 그것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 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었다.
충주 지역에서도 일제의 통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교통과 통신, 전기 등 근대적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충주의 농민생활은 비참하였다. 이에 따라 충주의 항일운동은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지방행정제도 개편]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예전의 지방행정조직이 거의 대부분 유지되었다. 다만, 1910년 10월 부령 제8호 「면(面)에 관한 규정」에 의해 최말단 지방행정기구로서 면의 지위를 확정하였다. 종전까지 면(面)·사(社)·방(坊)·부(部)·단(端) 등으로 지방에 따라 달리 불린 것을 면이란 이름으로 통일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원활한 통제를 위해 1913년 10월에서 1914년 4월에 걸쳐 지방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1914년 3월 1일을 기해 부(府)와 군(郡)의 행정구역 개편과 부제를 동시에 실시할 생각으로 1913년 12월 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 관할구역 및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을 발포하였다. 이때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의 주된 내용은 부와 군의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군의 수를 대폭 감축하는 것이었다.
1914년 4월 충주의 남변과 북변의 2면을 합하여 읍내면으로 칭했으나, 1917년 9월 충주면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앞서 1917년 6월 제령 제1호 「면제」와 부령 제34호 「면제시행규칙」을 발포하여 면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면제를 실시하고 면에 공공사무 처리능력을 부여한 것은 1910년에서 1917년에 걸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면장과 면직원의 이용 가치, 즉 식민 통치 하부 조직으로서의 이용 가치를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일제는 면장과 면직원을 제2류 이하의 인물로 평가했으나,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지닌 식민 정책의 하수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다.
충주군의 각 면에서도 이러한 면제의 실시로 면장과 면직원의 권한이 매우 커졌다. 처음에 충주군에는 지정면으로 선정된 지역이 한 곳도 없었다. 조선 말기까지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던 밀양에 지정면이 한 곳도 설치되지 않은 것은 충주인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일제 당국은 충주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1923년 2월 15일 총독부령 제 25호를 통해 충주면을 지정면으로 선정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 12월 부령 제103호 「읍면 및 읍면장에 관한 규정」을 발포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 4월 1일 읍제가 시행되었으며, 충주면도 충주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제가 실시된 후 충주군의 행정편제는 1읍 12면 145동리로 구성되었다.
[경제생활 실태]
일제강점기에 경제는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식량과 원료의 공급 및 상품의 판매라는 식민지 성격이 계속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인과 소수의 친일파들이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충주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소작농의 비율이 높아졌으며,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의 양이 약간 증산되었다. 그러나 증산된 쌀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 일본의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나, 조선 농민의 삶은 오히려 피폐화되었다. 조선 농민은 쌀을 증산하면서도 오히려 잡곡을 더 많이 먹게 되는 안타까운 실정에 처하게 되었다.
1932년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전체 농가 호수에서 자작농으로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국 평균을 훨씬 밑도는 7.3%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소작농은 전체 평균보다 월등하게 많은 68.9%나 되었다. 자작농의 27%, 자소작농의 38.6%, 순소작농의 39.6%가 춘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소작농의 38.6%는 임금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조차 곤란한 극빈농이었다.
또한 전체 농가 호수 가운데 부채를 지닌 농가가 무려 69%나 되었다. 1호당 평균 40원의 부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부채액이 265원이나 된 농가도 있었다. 부채액이 많았던 계층은 자소작농이었다. 충주에서는 부재지주가 90% 이상의 소작인을 고용하였다. 그 다음으로 높은 충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4.7%의 소작인을 고용하였다. 이로써 충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지주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충주의 상공업에서는 외견상 발전된 양상이 드러나기는 하나, 상공업 발전의 수혜자는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친일파들이었다. 충주에 거주한 일본인은 1910년에 178명이었으나, 1942년에는 1,192명으로 증가하였다. 일본인들은 많은 자금을 토지 매입에 투자해 많은 토지를 점유한 지주가 되었으나, 일부는 상공업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에는 일용 잡화·양복점·식용 잡화·양종업·과자 제조·어물점·주단포목점·목재업 등을 경영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원구상점(原口商店)은 1909년에 설립된 상점으로 거래선이 가장 넓었으며, 일본인이 주인이었다. 충주의 공업 작물은 종이·피륙·도자기·기와·된장과 간장 양조 등으로 가내 공업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유치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몇몇은 회사로 발전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일본인이 그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근대적 시설 정비]
일제의 식민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교통과 통신, 전기 등 근대적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시설은 편리성을 제공해 주기는 했으나, 그 설치의 근본 목적이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데 있었다.
1911년 4월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51호 「도로규칙」을 발포하였다. 이 도로규칙에 의해 도로를 1·2·3등 도로 및 등외 도로의 4등급으로 나누는 한편 도로를 정비하였다. 충주의 경우도 충주~청주, 충주~원주 간 2등 도로가 1914년 이전에 개통되었으며, 충주-탄금대간 3등 도로는 1915년 이전에 개통되었다. 서울~충주~부산간 1등 도로 가운데 충주~장호원 간 도로는 1916년에 개통되었으며, 공주~충주~강릉간 2등 도로 가운데 충주~제천 간 도로는 1915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충주~단양 간 도로는 1929년, 충주~영덕 간 2등 도로는 1930년에 준공되었다.
1928년 12월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충주인들도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의 경우 충주~영월 간은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조선배로 운행했으며, 충주~서울 간은 결빙기나 대홍수가 아니면 매일 운행하였다. 충주 탄금대에서 서울 용산까지 내려갈 때는 3일, 올라갈 때는 10일에서 3주가 걸렸다. 서울로 싣고 가는 화물은 주로 연초·곡물·땔감·숯 등이었으며, 충주로 싣고 오는 화물은 소금·명태·석유·잡화였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충주의 수운은 60%를 차지하면서 40%인 육운(陸運)에 비해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1905년 경성우편국 충주출장소가 개국하면서부터 충주에서 우편 업무가 개시되었다. 1906년 충주우체국으로 개칭되면서 국고금 출납까지 담당하였다. 1908년 전화 통신 사무, 1909년 경비 전화 통신 사무, 1911년 군용 전화 사무, 1926년 시내 전화 사무가 개시되었다.
1926년 충주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충주에 전기가 공급되었다. 개업 당시 전기가 공급된 호수는 400호, 점등수는 1,000여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말에 호수 680호, 점등수 1,911개로 확대되었으며, 1931년에는 호수 845호, 점등수 2,160개로 더욱 확장되었다.
[항일운동 전개]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래 충주에서는 독립 사상을 고취하며 우리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렸다. 한편,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이루려는 항일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 3·1운동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충주에서도 3월 11일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홍종호(洪鐘浩)와 김흥배(金興培)가 체포되었다. 3월 12일에도 수천 명의 군중이 충주 읍내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이 밖에도 교사 유흥식(柳興植)과 오언영(吳彦泳)을 비롯한 학생들이 3월 15일 충주 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적발되었다. 이때 유흥식은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용원장터에서는 4월 1일 장날을 기해 약 200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언문에는 이희갑(李喜甲) 외 7인이 연서했으며, 이것이 주변에 배포되었다. 당시 용명서당(龍明書堂)의 학생이었던 단경옥(段慶玉)은 서당 학생들을 동원하다가 일본인 선생에게 제지당하였다.
1925년 3·1운동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한 김진성(金振聲)이 충주에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김진성은 충청북도 일원에 군조금(軍助金)이라는 명칭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수집하여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1926년 8월 체포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에 자극을 받아 대소원보통학교 5학년 학생인 황후길·김상태·성낙일·조태국 등이 중심이 되어 대소원성공회 주교실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1930년 2월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을 선동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출동한 충주경찰서 순경들에 의해 주동 학생들이 연행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신문을 받은 후에 훈방조치되었다. 그러나 이 학생들은 당시 교장이었던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퇴교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