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84 |
---|---|
한자 | 抗日抵抗文學-象徵, 尙火- 大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방종헌 |
[정의]
대구광역시 출신의 시인 이상화의 문학과 저항정신.
[일제 저항문학과 이상화]
우리 민족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치욕과 수난의 시대였다. 우리의 주권이 상실되었고, 외세에 억압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치욕과 수난을 극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근대적 가치의 확산과 함께 민족주의의 고양을 식민지 시대 극복의 핵심 가치로 본 사회 문화 운동도 펼쳐졌다.
문학은 이러한 사회 운동의 하나로 애국 계몽 사상의 확장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대 계몽사상과 민족주의적 현실 인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계몽이나 현실 자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지를 내세운 작가도 있다.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와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과 극복 의지가 있다. 일제 저항문학의 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저항이란 말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반대, 즉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힘에 굴복하여 따르지 않고 거역하거나 버팀이란 뜻을 지닌다. 이에 문학과 합성하여 저항문학이란 명칭을 쓸 수 있다. 동시에 문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는 자유다. 어떤 제약에서도 벗어나 작가의 자유로운 정신을 표현하는 것 또한 중요한 가치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랑의 가치도, 평화도 진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부당한 권력으로 인한 억압에 대한 반대는 저항문학을 낳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원래 저항문학은 레지스탕스 문학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군에 대하여 저항한 문필활동을 가리킨다. 1940년부터 4년 동안 독일에 점령 당하였을 때 아라공, 엘뤼아르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활동이다. 이를 번역하여 저항문학이란 명칭을 언급하지만 우리 현실에 적절한 용어가 없어 그대로 저항 문학이란 용어로 쓴다.
그러나 서양의 명명에 의존하지 않고 본다면 우리에게는 그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봉건적 신분제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조선 후기 「호동거실」을 쓴 역관 이언진을 들 수 있다. 이언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저항과 자존감이다. 부조리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자신에 대한 믿음, 자존감이며 자아의 주체적 인식에서 가능하다. 외적 현실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굳건한 의지가 현실을 뛰어넘고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언진이 보여 준 저항정신, 어딘가 모르게 이상화와 닮았다.
[이상화의 문학 활동과 정신]
근대란 말 속에는 문명이란 개념이 숨어 있다. 우리에게는 개화란 말과 동일시된다. 우리에게 근대란 문명개화였으며, 자연스럽게 서구 중심적 가치를 의미하였는데, 그 속에는 군사적, 물리적 힘을 지닌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부국강병, 식민주의가 숨어 있다. 동시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하는 명분이기도 하였다. 제국의 확장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개념이 강화되었으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또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며,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이나 동학혁명 등 다양한 주체적 활동이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과 민족의 역량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을 통해 근대화를 성취한 일본 또한 이런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병합하므로 근대화의 의지가 꺾이게 되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무단 통치는 토지 수탈로 이어졌고, 동화주의를 내세워 일본어 학습, 천황에 대한 충성을 조선 사람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는 당연히 민족적 저항을 불러왔고 조선 근대 사상 최대 규모의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이후 일제는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론, 출판, 집회의 규제를 일부 완화하였다.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확장되는 공간의 시기였으나 본질적인 문제, 식민지하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3·1운동의 결과가 기대한 만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자, 이로 인한 좌절감이 현실 대응의 차이를 가져와 현실을 외면하거나 지식인의 무력감을 표출하거나 일제와 타협하는 부정적 현상도 나타났다.
우리의 근대 문학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싹을 튼다. 의병 활동이나 동학농민운동, 애국계몽운동의 전개에서 「창의가」, 「용담유사」, 「애국가」 등 가사나 창가를 통한 다양한 문학 활동이 주어졌으며, 서구 문학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문명의 수용을 노래한 새로운 형식의 문학들도 전개되었다.
식민지하의 부당한 현실과 극복의 방향마저 보이지 않을 때의 암담함은 20년대의 퇴폐적 우울한 낭만파의 경향을 낳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민족 의기를 모색하기 위한 시조 부흥 운동과 같은 현상은 소극적 저항의 형태라 일컬을 수 있다.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를 띤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이 나타났다. 1926년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란 명제 속에 조국의 회복을 임이란 대상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동시대에 활동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있다. 1930년대 후반 심훈, 이육사와 1940년대 초반의 윤동주 등도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식민지 현실에 소극적 저항이나 타협적 거리두기로 연명하거나 일본의 정책에 동조, 찬성하여 친일문학으로 나아갈 때, 소수이지만 이들이 보여준 의기는 기록되고 옹호되어야 한다.
이상화의 시적 지향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먼저 ‘백조(白潮)’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보여 준 낭만적 성향의 작품들과 사회주의 문학운동인 파스큘라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보여 준 민족적 저항의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나의 침실로」로 대표된다면 후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대표될 수 있다.
대구는 1906년 대구광문사와 대구광학회[이상화의 큰아버지가 운영한 우현서루]가 결성되어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다. 대구는 1907년 경제자립과 국권 수호를 외치며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공간이다. 또한 조선국권회복단을 중심으로 대한광복회가 만들어져 독립을 위한 활동이 이루어진 공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그 중심에 있던 집안 속에서 생장한 이상화이다.
이상화의 성장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세상의 험난함에 물들지 않았고, 그 험난함을 이겨나갈 희망을 지닌 굳건한 토대가 시인의 생활 공간 속에 드러난다.
이상화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나 이상화의 어머니는 도량이 넓었으며 또한 백부의 훈도로 경성 중앙중학교에 입학 때까지 집에서 사숙, 한학을 익혔고, 백부가 운영하던 우현서루를 드나드는 지사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3.1운동 때, 이상화는 당시 대구 학생운동에 직접 가담하여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날로 가중되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서울로의 도피가 불가피해졌다. 이상화는 서울의 박태원[연전 영문과 재학, 성악에 관심을 가진 선구적 음악인]의 서대문 냉동 집에 함께 지내게 된다.
서울에서 이상화의 생활은 3·1운동의 좌절에 따른 우울한[이상화의 전생애에서 이어지는 음주, 사랑의 과정을 하나의 추상적 어휘로 적을 때 드러나는 특질] 생활과 이러한 생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의 갈등이 이어진다. 이는 곧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 현실과 이상의 혼재가 빚어낸 삶의 질곡이라 할 수 있다.
빙허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이 되고, 같은 동인이었던 월탄, 노작, 회월 등과 어울려 시와 술과 인생을 논하며 실의와 좌절의 퇴폐적 분위기에 어울렸다. 이 시절에 형성된 시들은 이상화의 초기시로 분류될 수 있으며 후에 「비음(緋音)」[『개벽』, 1925. 1.]으로 나타난다. 『백조』 창간호에 발표된 「말세의 희탄」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저녁의 피무든 동굴 속으로
아- 밋업는, 그 동굴 속으로
ᄭᅳᆺ도 모르고,
ᄭᅳᆺ도 모르고
나는 걱구러지련다
나는 걱구러지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ᄭᅮᆷ꾸는 미풍의 품에다
낫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취한 집을 세우련다
나는 속압흔 우슴을 비즈련다
저녁의 피무든 동굴 속으로 거꾸러지고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려는 자조적 자세는 푸른 설움이다. 한편 젊기에 좌절할 수만은 없었으며, 희망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마돈나’를 찾아 ‘부활의 동굴’로 가고자 했으니, 현실의 좌절을 퇴폐의식으로만 표출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정열적인 어조로 구원의 상징 ‘마돈나’를 그리며 아름답고 오랜 나라-부활의 동굴이며 영원의 안식처-인 침실로의 지향 의지는 그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민족 의지이며, 미래에의 희망, 푸른 웃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백조’ 동인들과의 퇴폐적 삶의 극복을 위하여 상화는 평소에 꿈꾸던 프랑스 유학을 위하여 1922년 일본 도쿄로 갔다. 도쿄에서 간토대지진, 1923년 9월, 무수히 학살되는 동포를 목격하고 약소민족의 비애-나라를 가지지 못한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이듬해 1924년 봄에 귀국을 한다. 그리고 1924년 말엽, 초기시의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낭만주의 경향에서 벗어나 민족의식이 좀 더 강하고 뚜렷하게 시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즉 잠재된 민족 의지가 강렬하고 열정적 낭만의 분위기에 가려져 있다가 그 열정적 낭만이 가라앉자 민족의식이 주제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한편 새로이 등장한 사회주의적 경향의 문학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일련의 경향파적 작품을 발표하며 사회주의적 문학단체인 파스큘라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가 1925년이며, 민족의식이 강하게 표면화된 시들도 대체로 이 시기 전후의 작품이니, 이상화가 생전에 분류하여 소제목을 붙인 「둔서(遁)의 선물」, 「통곡」, 「빼앗긴 혼」, 「가상」의 작품에 잘 드러난다.
이상화의 시에 드러나는 경향적 색조는 대체로 소재적 측면이 강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의 피폐한 조선의 생활상은 경향 작가가 아닐지라도 문학의 소재로 나타남은 드문 예가 아니다. 이상화 또한 파스큘라에 가담하여 평론까지 썼으나 시에 있어서 주조는 민족 감정과 저항의식에 있었음은 이상화의 평론에서 확인된다. “문학은 본질 생명의 부작용인 모방의 취미와 유랑생활의 몰아맹종의 착각상태인 인습의 향락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 원체로서 창조해야 한다”[『문예운동』 창간호, 1926. 재인용]라고 하였으니 사람다운 삶과 의식 있는 작가의 자세를 요구한 셈이다. 이러한 사고의 시화(詩化)로 이상화는 식민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낳게 된 배경이 된다.
몇 편의 시를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의식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땀찬 이마와 맥풀린 눈으로
괴론 몸 움막집에 쉬러 오는 때다
사람아 마음의 입을 열어 그들을 기리자
하느님이 무덤속에서 살아옴에다 어찌 견주랴
-「저무는 놀 안에서」[1925년 작, 1928년 발표]
아, 가도다, 가도다, ᄶᅩ처가도다.
이즘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채쥐고, ᄶᅩ처가도다.
진흙을 밥으로 햇채를 마서도
마구나, 가젓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로 일즉
차라리 주린 목숨 ᄲᅢ서 가거라.
-「가장 비통한 祈慾」[1925]
아, 나의 마음은,
사람은 이러케도,
광명을 그리는가-
담조차 못 가진 거적문 압헤를,
니르러 드르니 울음이, 돌더라
-「빈촌의 밤」[『개벽』, 1925]
이러한 시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소외되고, 핍박받는 이들에게 이상화의 시선은 닿아 있다. 그러한 애정 못지않게 이 민족의 비극적 운명에 통곡을 터뜨리는 시인의 자조적 생각도 있었으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는 내 혼아/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와 같은 구절에서 나타난다.
이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러한 설움과 웃음의 괴리 속에서, 즉 민족의 현실 속에서 좌절과 실의를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의식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1927년 이후 왕성한 창작 활동이 주춤하게 된다. 1926년 『개벽』에 발표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개벽은 폐간되고, 일제의 감시는 심화되었다. 특히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되어 투옥되고 고문까지 받게 된다. 동시에 이런 과정에서 몇 번의 가택 수색에서 원고를 빼앗기고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이상화의 사랑으로 이상화를 찾아오는 울분의 지식인들과 어울려 실의와 좌절의 감정을 술로 달래며 살았다. 생계를 위하여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 「역천(逆天)」이다. 삶에 대한 애정이 짙게 깔려 담담하고도 밝은 서정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것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망국의 한이 절실하고 민족의 비애가 하늘마저 용납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이때야말로 이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밤 열푸른 유리로 천정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종왔다 얼골을 처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운 실날같은 바람은 길을 끄으려 배리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중략]
걸림없이 사는듯하며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가 어울려 한뭉텅이가 못되어지는 이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같고 어린이 마음 우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모리 불러도 멋대로 못가고 생각조차 못하게 지천을 떠는 이 설음
벙어리같은 이 아픈 설음이 츩덩굴같이 몇날 몇해가 엃기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역천」[『시원』 2호, 1935. 4.]
만주사변으로 맏형 이상정 장군을 찾아 만주로, 돌아와서 다시 강제 구금으로 고초를 겪고 교남학교[현 대륜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맡아 무보수로 학생을 지도하였다. 술을 한 잔도 대는 일이 없이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가정도 돌보기 시작하여 비록 생활이 곤란하여도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상화와 고월』, 165쪽]고 한다. 문학에서도 이육사, 윤복진, 이설주와 같은 시인과 접촉을 하였으며 젊은 문학도들을 직간접으로 지도하였으며, 그의 정열이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사업에 모여졌다[『상화와 고월』, 166쪽]고도 한다. 아쉬움은 이상화와 직간접으로 교류를 맺은 문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문학에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프랑스 시의 평석, 춘향전의 영역, 국문학사 등을 준비하다 완결시키지 못한 채,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1943년 영면하게 된다.
[이상화 문학의 영향과 계승]
이상화의 고통과 울분은 한 시대의 구성원-지식인으로 지녀야 할 삶의 자세에서 오는 태도-의 상징적 태도이며 보편적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징적 태도에 일관성을 지니기 어렵고 보편적 모습이라도 전형이 되기 어렵다. 이상화는 그런 점에서 상징성과 전형성을 지닌 시인이다. 저항을 몸으로, 시로 보여준 몇 아니 되는 소중한 시인이다. 지식과 행동의 일치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특히나 폭력적 억압 속에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화의 문학적 지향은 자유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자유로운 세상을 위한 첫걸음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벗어나는 일, 즉 조국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일생을 두고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한 시인은 드물다. 더러는 시적 성취는 뛰어나지만 사회 인식이나 주체적 자각이 부족한 경우도 있고, 사회적 활동은 뚜렷하나 문학적 성취가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이 둘을 겸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등이 찬상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서 노래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그 형식과 내용의 성취가 뛰어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두고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아무런 차질 없이 이루었으므로, 이 시는 자연스럽게 읽히면서 절실한 감동을 준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5, 188쪽]고 하면서, 이상화를 “자기 작품 세계를 스스로 혁신하고자 하는 노력을 더욱 철저하게 하고, 생활에 근거를 둔 시가 뛰어난 표현을 갖추어 절실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입증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5, 184쪽]고 하였다. 이처럼 이상화의 시를 일제 저항문학의 한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나의 침실로」는 이상화의 2대 걸작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초기시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그의 시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은 낭만주의적 태도다. 현실 밖에 이상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현실 밖이라면 어디로든지 가겠다는 태도를 그는 뚜렷하게 나타낸다. 그의 초기 낭만주의적 태도는 물론 현실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서 온다. 현실에서의 환멸은 초기에는 가족제도, 애정 생활 등에서 나오며, 후기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다.[김현·김윤식, 『한국문학사』, 149쪽)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시비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항일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비이다. 1946년 김소운 수필가의 제안에 1948년에 서게 된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다. 이상화가 소수 문학인들에 의해서 그 정신의 계승이 전개되어 오다 1996년 죽순문학회에서 상화고택 보존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시민들의 관심에 나타난다. 이후 1998년에 이상화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화로가 만들어졌으며, 2008년 2월 이상화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추모 계승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구 달서구에는 상화로가 있다. 대구 수성구에는 수성못 상화동산이 있다. 흉상이 있고, 시비가 있다. 또한 대구는 매년 상화문학제를 열고 있다. 이상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은 상화고택, 생가[라일락(이상화나무-수수꽃다리 200살 추정) 한옥카페]가 되어 있다.
더불어 이상화시인상을 제정하여 1986년 이설주를 시작으로 매년 한 명의 시인에게 수상하여 창작 활동을 격려하고 있다. 대구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 적어도 300명은 족히 넘는다. 다른 갈래에 비하여 시인이 많음은 이런 보이지 않는 전통의 힘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