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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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3국의 7년 전쟁.
[개설]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100년이 넘는 내전을 극복하고 통일한 일본은 조선 건국 이후 200년 동안의 조선왕조 평화 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켰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전력은 매우 막강하여 한 달도 되지 않아 서울을 함락하고 이어 함경도 일대뿐만 아니라 평양까지 함락하였다. 이렇게 되자 자국의 안전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한 명나라가 개입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여력을 소진한 명나라는 여진족이 흥기하자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거의 전국이 전쟁터가 된 조선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임진왜란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항쟁사에 초점이 모아졌으며, 제국주의 시대 일본은 대륙 침략의 선구적 업적으로 미화하였고, 중국에서는 조선을 도와서 일본을 패퇴시켰다고 하여 대국주의(大國主義)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당시 의병의 활약상은 크고 작은 왜곡이 있으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윤색과 과장, 날조와 왜곡이 심하여졌다.
[대구에서의 임진왜란]
1592년 4월 21일에 일본군이 대구 읍내에 쳐들어온 이후부터 1593년 5월 15일 퇴각할 때까지 대구는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이자 중간 기지로 활용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부사 윤현(尹晛)은 동화사(桐華寺)로 들어가 관군을 지휘하면서 전쟁에 대처하였다. 윤현은 대구부 및 인근 지역의 전황을 상급자에게 수시로 보고하고, 주요 지역에 복병을 설치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이에 1593년 1월에는 일본군이 쳐들어와 동화사와 인근 암자들을 불태웠으며 삼성암(三聖庵)에서 업무를 보던 윤현은 맨몸으로 빠져나갔다.
한편, 1592년 7월 6일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서는 대구부 사족들이 향회를 열어 정사철(鄭師哲)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사철이 병으로 사양하면서 7월 18일 서사원(徐思遠)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의병진을 구성하였는데, 대구 지역의 유력 사족들이 면·리를 책임졌다. 손처눌(孫處訥)은 수성현, 곽재겸(郭再謙)은 해안현, 이종문(李宗文)은 하빈현의 대장을 맡았다. 이후 서사원이 병환과 8월 29일 할머니 사망으로 의병장을 내려놓아 손처눌이 승계하였다. 손처눌도 1593년 2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의병장을 내려놓게 되면서 대구 의병 활동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당시 의병이 점차 관군으로 흡수되고 1593년 5월경에는 일본군이 동남 해안으로 물러난 상황과도 맞물려 있었다. 대구 지역 의병의 전공은 비록 혁혁하지 않았지만 관민이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대구 지역 내의 산속에 머물면서 대구부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일본군이 퇴각하자마자 명군이 팔거[칠곡]에 1년 정도 주둔하면서 대구는 경상도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1593년 5월 15일에는 명나라 군대가 들어와 1594년 7월까지 성주목 팔거현 가산산성(架山山城)에 주둔하였다. 대구부민들은 명군의 양식과 말먹이를 마련하여야 하였고, 명군들은 민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민폐를 끼쳤다. 도원수 권율(權慄)도 하빈현에 주둔하였는데, 이후 대구부사들은 하빈현을 거점으로 팔거현을 오가면서 군정을 수행하였다. 1594년 초부터는 대구부사 박홍장(朴弘長)과 군관 전계신(全繼信)이 백성들을 불러 모아 둔전(屯田)을 경영하여 군량을 확보하였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정광천(鄭光天)도 5월 17일에 고향에 돌아왔으며, 1592년 10월 28일 삼가현으로 피신하였던 서사원도 돌아와 1593년 6월 13일 대구 북서쪽 이천에 터를 잡았다. 귀향 이후 사족들은 농사에 집중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생존하여 나갔다. 명군 주둔 군영에 물건을 팔아서 식량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사족들은 전쟁 중에도 제사나 독서를 포기하지 않았다.
1596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은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제안으로 대구 달성에 경상감영을 열고 석축을 더 쌓았으며, 4월에는 이원익의 명령으로 공산산성을 보완·수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과 관찰사 이용순이 공산산성을 방어 거점지로 활용하였으며, 사방에서 오는 군량들을 공산산성에 비축하였다가 경주와 울산으로 이송하였다. 1597년 9월에는 일본군이 공산산성을 침략하여 공산산성 안에 쌓아 둔 무기와 수만 석의 곡식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대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라는 지리적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어 결국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대구가 큰 고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