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43
한자 光復會
이칭/별칭 대한광복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5년 8월 25일연표보기 - 광복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광복회 강제 해산
최초 설립지 달성공원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3]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박상진|채기중|우재룡|양한위|양제안|김한종

[정의]

1915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

[개설]

광복회(光復會)[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무장투장을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대표적인 국내 독립운동 단체이다. 광복회는 1915년 초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鎮)을 중심으로 창립한 재건 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와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창립한 풍기광복단(豐基光復團)이 1915년 7월 15일[음] 통합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

광복회의 목적은 무장투쟁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광복회는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실현하는 것을 마지막 목표로 두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복회는 독립 달성을 위한 강령으로 무력 준비, 군관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 무기 확보, 본부 및 연락 기관 설치, 행형부(行刑部)를 통한 일본인 고관과 친일 부호 처단, 독립전쟁 등을 채택하였다. 광복회의 조직은 총사령관 박상진, 부사령관 이석대(李奭大),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재무부장 최준(崔浚), 사업총괄 이복우(李福雨), 지부장 채기중[경상도]·김한종[충청도]·이병찬[전라도]·김선호[경기도]·최봉주[함경도]·조현균[평안도]·김동호[강원도]로 편성하였다.

광복회는 대구에 설립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만주 기지에는 부사령관 이석대를 파견하여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金佐鎭)이 맡았다. 광복회는 대구의 상덕태상회, 경상북도 영주의 대동상회(大同商會)를 비롯하여 서울·해주·광주·삼척 등지와 만주의 안동여관·봉천의 삼달양행 등 곡물상과 잡화상을 연락 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다. 마련된 군자금은 상점을 통하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로 전하여졌다.

또한 광복회는 상동광산(上東鑛山)과 직산광산(稷山鑛山)을 습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고, 1915년 12월 경상북도 경주에서 세금을 실은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였다. 광복회는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하여 각 도별로 대상 인물을 선정하고, 친일 부호들에게 운동 자금 제공 관련 통문을 발송하는 활동을 벌였다. 1917년 8월 초 박상진의 집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 지역을 나누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 김한종은 충청도를 맡았다.

광복회의 통문에 친일 부호들의 협조가 부족하자 무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비협조적 부호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계획하였다. 1917년 9월 경상북도 칠곡의 장승원(張承遠), 1917년 12월 충청남도 아산의 박용하(朴容夏) 등에 대한 처단이 이루어졌다. 또한 전라남도 보성의 서도현(徐道賢)과 박곡(朴谷)의 양재학(梁在學) 등도 대상이었다. 그 밖에 채기중은 경상북도 상주, 예천, 안동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활동을 벌였다.

1918년 초 광복회가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광복회사건과 관련하여 1918년부터 3년 동안 공주지방법원, 경성복심법원, 대구복심법원, 경성고등법원에 이르기까지 재판이 이루어졌다. 20명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재판 과정에서 형이 줄거나 또는 일본 쇼와[昭和] 왕 즉위 특별사면으로 감형되었고 6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1921년 8월 박상진과 김한종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채기중·김경태·임세규·강순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광복회는 1910년대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공화주의를 표방하여 독립운동을 발전시켰으며,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여 의열 투쟁과 독립투쟁에 의한 민족운동을 고양시켰다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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