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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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妓生組合 |
이칭/별칭 | 대구기생조합소,대구예기조합,대구조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10년 5월 - 대구기생조합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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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7년 1월 - 대구기생조합에서 달성권번으로 개칭 |
성격 | 기생조합 |
설립자 | 김수희 |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기생 노동조합.
[설립 목적]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은 1909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 관청에 예속되어 있던 교방(敎坊)의 관기(官妓)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영업과 권익 보호를 위하여 결성한 사설 기생조합이다. 대구조합, 대구기생조합소, 대구예기조합이라고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기생조합은 1910년 5월 김수희를 조합장으로 하여 대구의 기생들이 결성한 조합이다. 기생조합에서는 기생 교육을 위하여 속칭 ‘기생학교’라고 불리는 ‘기생양성소’를 세워 어린 동기(童妓)들을 대상으로 일본어, 조선어, 산술, 서화 등을 가르쳤다. 대구기생조합은 설립에 즈음하여 일본어 학습과 토론회를 운영하였는데 토론회의 한 주제가 ‘한국을 융성케 하자면 흥학(興學)과 양병(養兵)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였다. 주제가 민감하여 대구경찰서에서는 토론회를 해산시키고, 기생들을 경찰서에 불러 “여자가 정치를 언론하는 것은 부녀의 덕을 문란케 하는 것”이라며 훈계를 하고 돌려보냈다.
대구기생조합은 1911년 광주 신청(神廳)에 소속되어 있던 일제강점기 가야금 산조 명인 강태홍(姜太弘)을 초빙하여 기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1918년 무렵 대구기생조합에는 30여 명 기생이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대구기생조합 기생들의 장기는 대부분이 가야금 병창이었고, 일부는 대궐 안의 잔치 때에 벌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였다.
대구기생조합은 1923년 9월 전국특산품진열대회 등과 같은 각종 행사에서 공연하거나 잔치에서 연주를 하며 활동하였다. 당시 대구기생조합의 조합장은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100원을 쾌척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던 염농산(廉朧山)이었고, 총무는 엄주상(嚴柱祥)이었다. 1924년에는 대구기생조합의 기생들이 요리점에서 3개월분의 화대를 지불하지 않았다며 조합에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자신들의 권익옹호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구기생조합은 1927년 1월 달성권번(達城券番)으로 명칭을 바꾸어 다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기생조합 기생들에 의하여 대구 지역 전통음악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지역 전통문화 예술이 계승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