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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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勇進團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25년 1월 5일 - 용진단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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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대구노동공제회관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
성격 | 사상단체 |
설립자 | 이상정|서상욱|안달득|김민동 |
[정의]
1925년 대구광역시에 설립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
[설립 목적]
용진단(勇進團)은 대구 지역의 용맹한 신흥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단원 간 단결, 부조, 옹호, 친목 등을 목적으로 1925년 1월 발기회를 열었고, 사상 연구를 통한 민중의 교양기관을 지향하며 1월 5일 창립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용진단은 1925년 1월 1일 발기회를 개최한 뒤 1월 5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창립총회 겸 발회식을 통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임원은 위원장 이상정(李相定), 총무 박두리, 방범부 정성득(鄭成得) 외 3인, 사교부 안달득(安達得) 외 2인, 사업부 서상욱(徐相郁) 외 1인, 인사부 김민동(金旻東) 외 1인, 서기 이유재(李柳載) 외 1인으로 구성하였다. 용진단은 1925년 1월 11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열린 친일 반동 단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의 강연회를 성토하였다.
용진단원 안달득은 1월 11일 저녁 대구역을 통하여 전주로 이동하는 친일단체 국민협회에서 활동하던 채기두(蔡基斗)를 공격하다 대구경찰서에 검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안달득은 서울의 인사동에서 적박단 단원과 충돌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6개월의 구형을 받았다. 1925년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한 용진단은 시위를 일으켜 종로경찰서와 대구경찰서에 검속되는 탄압을 받았다.
1925년 7월 낙동강이 범람하여 대구의 남산동, 덕산동, 봉산동 등이 침수되자 용진단은 대구의 사회운동단체와 연합하여 구호반을 조직하고 대민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 식량을 무상으로 배급하고 북내동에서 물에 갇힌 시각장애우 6명을 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용진단은 1925년 8월 ‘예천 형평사사건’이 발생하자 대구의 16개 단체와 함께 ‘예천사건대책협의회’를 조직하여 반형평운동에 적극 대응하였다. 용진단은 1926년 4월부터 대구의 사회운동단체들과 사회운동단체 합동간친회를 여는 등 사회운동단체 합동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의의와 평가]
용진단은 시국대동단 성토를 시작으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대구 수해, 예천 형평사사건 등에 적극 대응하는 한편 대구 사회운동단체의 합동을 위한 노력을 벌임으로써 대구 지역 사회운동의 고양과 전국적 차원의 사회운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