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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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共産黨 大邱市委員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최초 설립지 |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 -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1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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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기관 단체 |
[정의]
1945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소속 조직.
[개설]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朝鮮共産黨大邱市委員會)는 광복 직후에 대구 지역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지역 조직이다.
[설립 목적]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위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내세우고, 모든 진보 세력이 참여한 민족통일전선(民族統一戰線)을 바탕으로 한 인민 정부의 수립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변천]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1945년 9월 11일 이후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위원장은 김일식(金一植)[1911~?]이 맡았으며, 좌익 3당 합당 추진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나섰고, 1947년 2월 이견이나 갈등 없이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 지방 조직이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의 김일식은 1946년 2월에 열린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장적우(張的宇)[1902~?], 황태성(黃泰成)[1906~1963] 등과 함께 경상북도 대표로 참석하고, 「조선공산당 대회 소집 준비위원회 구성 건의서」를 당 중앙위원회에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의 지도부는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같은 통일전선 조직,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 부녀동맹, 청년동맹 등과 같은 대중운동 단체의 지도부와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는 1946년 6월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대구 지부와 좌우 합작 형태의 대구공동위원회(大邱共同委員會)를 구성하였다. 결정서에 따르면 “치안 및 관공서의 주요 직책들이 우익에게 점유되었고, 좌익의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며, 당원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판단이 대구공동위원회의 결성을 이끌어 내었다고 밝히고 있다.
1946년 9월에 들어서자 좌우 합작을 추진하였던 경상북도군정청(慶尙北道軍政廳)은 태도를 바꾸어 본격적으로 좌익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9월 12일에는 경찰이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의 비밀 회합 장소를 급습하여 지도자 다섯 명을 체포하였다.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의 김일식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에 김일식은 윤장혁(尹章赫), 최문식(崔文植) 등 대구 지역의 좌익 인물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일식은 1947년 8월 2일 대구지방심리원 제4호 법정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김일식은 재판 과정에서 “일제시대 왜정에 협력하여 조선 사람을 구박하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들을 구형하려 함은 어찌 된 일인가? 고로 검찰관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한다”라는 발언으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는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朝鮮共産黨慶北道機關)을 재건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또 광복 후 대구 지역의 대중 조직과 통일전선 운동을 지도하면서 좌익 노선의 국가 건설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