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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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大明洞 古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민선례 |
조성 시기/일시 | 삼국시대 - 대구 대명동 고분군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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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9년 7월 23일~11월 13일 - 대구 대명동 고분군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소재지 | 대구 대명동 고분군 - 대구광역시 남구 중앙대로40길 48-1[대명동 15]|대명동 17|311|315 |
소재지 | 대구 대명동 상록주택 재개발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1858-4 일원 |
성격 | 고분군 |
양식 | 나무덧널무덤[목곽묘]|돌덧널무덤[석곽묘]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개설]
대구 대명동 고분군(大邱 大明洞 古墳群)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이다. 2019년 7월 23일부터 2019년 11월 13일까지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위치]
대구 대명동 고분군[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15, 17, 311, 315번지 일대]은 대구고등학교, 영남대학교 병원, 대구교육대학교, 남구종합사회복지관, 영선시장 등이 있는 명덕로와 대명로 사이의 대구 중심을 관통하는 중앙대로 동서쪽에 솟은 구릉 일대에 있다. 대구 대명동 고분군의 북쪽 중앙 일부를 포함하여 대구 대명동 상록주택 재개발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남구 대명동 1858-4번지 일원]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구 대명동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37~1938년 사이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남구릉고분군 2호를 조사한 이후 사이토 다다시[齊藤忠]가 남구릉고분군 7·8호분과 북구릉고분군 1·2호분을 조사하면서 남구릉고분군 2호를 재조사하였다. 이후 주거군 밀집 지역으로 변하여 대명동 고분군은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2019년 7월 23일부터 2019년 11월 13일까지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진행된 대구 대명동 상록주택 재개발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원삼국시대 나무덧널무덤[목곽묘] 3기, 독무덤[옹관묘] 1기, 수혈 1기, 삼국시대 나무덧널무덤[목곽묘] 12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1기, 암광묘[벽일부와 바닥만 남아 정확한 형태 및 구조, 성격 파악이 어려워 편의상 암광묘로 분류] 6기, 주구 3기, 수혈 2기, 조선시대 이후 토광묘 4기, 석조유구 1기 등 54기가 조사되었다.
[형태]
일제강점기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대구 대명동 고분군은 영남대학교병원과 대구고등학교, 대구교육대학교가 있는 구릉 지역의 남구릉고분군과 대구고등학교 동쪽 능선을 따라 영선시장 및 상수도사업소를 잇는 구릉의 북구릉고분군으로 구분하였다. 북구릉고분군[북구 2·7·8호분]은 봉분의 크기는 남북 14~25m, 동서 12~15m의 낮은 봉분이며, 봉분의 형태는 타원형 또는 원형이다. 남구릉고분군[남구 1·2호분]은 봉분의 크기는 남북 12.5~15m, 동서 15m, 높이 2.3~3m이며, 평면 형태는 타원형 또는 원형 봉분이다. 조사된 고분군의 매장 주체부는 모두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이며, 기반암을 채석한 판석, 천석을 이용하여 벽석을 축조하였다. 나무덧널무덤은 돌덧널무덤과 중복되거나 인접하여 있다. 나무덧널무덤은 동혈주부곽식, 크기가 다른 천석으로 시상석을 조성한 형식, 무시설식으로 구분되며, 유물은 양단부장 또는 한쪽 단벽부장이 확인된다.
[출토 유물]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대구 대명동 고분군에서는 굽다리접시[고배], 목긴항아리[장경호], 굽다리목긴항아리[대부장경호], 접시[배] 등의 토기류와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금귀걸이, 쇠화살촉, 재갈, 쇠손칼[도자], 쇠낫, 쇠도끼 등의 금속류가 출토되었다. 남구릉고분군 7호분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가 경주 황남대총 북분 부장품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5세기 후로 추정된다. 대구 대명동 상록주택 재개발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목긴항아리, 굽다리목긴항아리, 뚜껑있는굽다리접시, 손잡이를단굽다리접시, 바리모양그릇받침, 가락바퀴[방추차] 등 토도류와 미늘쇠[유자이기], 발걸이[등자], 쇠화살촉, 쇠도끼, 쇠손칼 등 금속류, 수정제 구슬 1점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 돌덧널무덤에서 인골과 상어 척추뼈 등이 출토되었다. 대구 대명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고분군의 축조 시기는 2세기 말에서 6세기까지로 추정된다.
[현황]
대구 대명동 고분군 일대는 1940년대 초까지 40기 이상의 봉분이 확인되었지만, 1937년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어 도로와 병원, 학교, 빌라 등 건물이 들어서 주거 밀집 지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대구 대명동 고분군 주변에 대한 재개발사업이 이루어져 일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확인되는 유구도 상당 부분 현대 건축물에 의하여 훼손된 것으로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대구 대명동 고분군은 내당동·비산동 고분군처럼 도시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처음으로 대구 대명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동서 방향의 능선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 및 사면 일대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출토 유물로 보아 대구 대명동 고분군은 대구 지역의 중심 고분인 대구 달성 고분군보다는 위계가 낮은 대구분지 남쪽에 자리한 집단에 의하여 2세기 말부터 6세기까지 오랫동안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대구 지역 고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