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74
한자 大邱 大鳳洞 遺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로 260[대봉동 60-10]
시대 선사/석기,선사/청동기
집필자 김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9월 16일~2004년 11월 30일 - 대구 대봉동 유적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원소재지 대구 대봉동 유적 -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로 260[대봉동 60-10]지도보기
성격 생활 유적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있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

[개설]

대구 대봉동 유적(大邱大鳳洞遺跡)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있었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이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계획된 주상복합건물 신축에 앞서 2003년 9월 16일부터 2004년 11월 30일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집자리[住居址], 청동기시대 집자리, 수혈유구, 도랑유구[溝狀遺構]와 삼국시대 도랑유구, 근대 우물이 확인되었다.

[위치]

대구 대봉동 유적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60-10번지에 해당하며 동쪽에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 서안에 넓게 형성된 충적지에 있다. 1923년부터 1984년까지 대구상업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신천 서안의 충적지에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대구 이천동 고인돌[支石墓], 대구 대봉동 고인돌, 대구 삼덕동 고인돌, 대구 동문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이 열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형태]

대구 대봉동 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2기가 조사되었는데, 장방형과 원형 형태를 띤다. 내부에 별도의 시설은 확인되지 않고,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33기가 조사되었는데, 도랑 유구와 하천을 중심으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1기], 장방형[28기], 방형[1기], 원형[3기]으로 구분된다. 세장방형과 장방형 집자리의 내부 시설에는 노지와 주혈이 있는데, 노지는 돌을 두른 형태[圍石式]와 무시설 형태로 구분된다. 노지가 한쪽으로 치우쳐 1개만 설치된 집자리[5·28·33호], 양쪽으로 2개가 설치된 집자리[1·9·16호], 돌을 두른 노지와 무시설 노지가 혼합되어 3개의 노지가 설치된 집자리[12·17호]가 있다. 주혈은 장축선상에서 2개가 확인되는 것, 네 모서리에서 확인되는 것, 벽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확인되는 것이 있다. 노지가 2~3개 확인되는 집자리 장축선상에 큰 주혈이 2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우진각 형태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의 집자리 중에는 중앙에 수혈과 양주혈을 갖춘 송국리식 주거지도 있다. 수혈 유구 34기가 조사되었는데, 원형, 장방형, 방형, 부정형을 띠고 있으며, 내부 할석이 집적되어 있는 것도 있다. 장방형의 수혈은 내부에 주혈과 노지 흔적이 있는 것도 있는데, 일부는 소형 집자리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물은 토기 767점, 석기 193점, 자기 1점 등 모두 961점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는 아가리 부분이 외반하고 짧은빗금무늬[短斜線文]가 2중으로 시문된 뾰족바닥 바리[尖底鉢]와 사격자문(斜格子文)의 단지[甕], 빗금무늬[斜線文] 뾰족바닥 바리 2점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수혈에서는 구멍무늬[孔列文], 골아가리[口脣刻目], 골아가리구멍무늬[口脣刻目孔列文], 골아가리짧은빗금무늬[口脣刻目短斜線文], 겹입술짧은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 등의 문양이 있거나 민무늬[無文]의 납작바닥바리[平底鉢]와 단지[甕], 항아리[壺], 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 돌칼[石劍], 돌낫[石鎌], 돌도끼[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화살촉[石鏃], 숫돌[砥石], 가락바퀴[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현재 발굴 조사 완료 후 주상복합아파트가 건립되어 대구 대봉동 유적은 소멸되었으나, 주요 유구를 사업부지 내로 이전하고 3D로 구지형을 복원하여 당시 마을을 재구성하도록 하였다. 대봉동을 비롯하여 신천 서안의 넓은 충적지는 대부분 개발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대봉동 유적신천 유역에서 확인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생활 유적이면서 청동기시대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개발로 인하여 이미 도시화되어 버린 신천 유역 충적지에 대하여 향후 유적 조사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신천 유역을 중심으로 한 대구 지역 선사 문화의 복원에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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