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816
한자 大邱 上里洞 古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고분
지역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209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민선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삼국시대 - 대구 상리동 고분군 조성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2월 2일~2월 21일 - 대구 상리동 고분군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1년 1월 11일~1월 28일 - 대구 상리동 고분군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소재지 대구 상리동 고분군 -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101,132|가르뱅이로21길 11[상리동 210]지도보기
소재지 대구 상리동 유적 - 대구광역시 서구 새방로 171[상리동 494] 일원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지도보기
성격 고분군
양식 돌덧널무덤[석곽묘]|돌방무덤[석실묘]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개설]

대구 상리동 고분군(大邱上里洞古墳群)은 2004년 2월 2일에서 2월 21일까지 실시한 대구 상리동~세방골 간 도로 건설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위치]

와룡산[299.6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중 상리동 가르뱅이마을의 남쪽 능선에 대구 상리동 고분군이 조영되었고, 북쪽에 금호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의 동쪽은 구마고속도로와 신천대로가 남북으로 개설되어 능선의 일부가 분리되었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①[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210번지 일대]은 북쪽 능선 말단부의 참사랑실버요양원이 있는 능선 사면부에 있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②[상리동 101번지 일대]는 대구 상리동 고분군①의 남쪽에 있는 가르벵이골을 지나 나타나는 얕은 능선 일대에 있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③[상리동 132번지 일대]은 계성고등학교의 북동쪽에 인접하여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구 상리동 고분군③을 일부 포함한 계성고등학교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1년 1월 11일부터 2011년 1월 28일까지 삼한문화재연구원에서 진행한 ‘대구 상리동 계성고등학교 이전 부지 내 대구 상리동 유적[상리동 494번지 일원] 발굴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 1기, 석실분 1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의 분묘, 집석, 수혈 등이 조사되었다.

[형태]

대구 상리동 고분군①에서 봉토의 크기 5~15m 정도의 중소형 고분 82기가 확인되었고, 고분은 능선의 정선부와 동쪽 및 남쪽 사면에 집중 분포한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②는 완만한 남쪽 사면에서 석곽으로 추정되는 벽석 일부와 도굴구가 확인되었다. 대구 상리동 고분군③이 있는 능선의 중앙부부터 봉토의 형태가 확인되는 고분 몇 기와 도굴구가 함께 확인되며, 고분군의 동쪽 부분은 구마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은 대구 상리동 고분군③의 남쪽 외곽인 계성고등학교 부지에서 확인된다. 돌덧널무덤은 구덩식[수혈식]이며, 크기는 길이 180㎝, 너비 70㎝, 깊이 40㎝정도이다. 돌방무덤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며, 북쪽에 장타원형의 주구를 설치하였다. 돌방무덤의 크기는 길이 213㎝, 너비 118㎝, 깊이 49㎝정도이며, 입구부는 전벽의 좌측에 최하단만 확인된다. 시상은 20~30㎝ 정도의 할석으로 시상의 테두리를 1단 설치하고 내부에 15~25㎝ 정도의 납작한 할석을 2단으로 채워 동장벽과 나란하게 설치하였다. 시상의 크기는 길이 199㎝, 너비 45㎝, 높이 13㎝이다.

[출토 유물]

대구 상리동 고분군에서는 굽다리접시편, 항아리편 등 삼국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최근 발굴 조사된 돌덧널무덤에서는 통일신라의 연질완과 원권문과 점열문이 인화된 병이 출토되었다.

[현황]

대구 상리동 고분군은 이미 도굴과 구마고속도로 건설로 유실되었고, 최근에는 능선을 따라 일부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송전철탑과 송전철탑 개설에 따른 임시 도로로 인하여 대구 상리동 고분군의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현재 대부분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야산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상리동 고분군은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고분 및 분묘 유적의 집중 분포가 확인되어 시대에 따른 무덤의 변화상을 보여 주는 연구자료로 의의가 있다. 또한 대구 지역 금호강 유역의 고분 유적과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삼국시대 이후 고분의 구조와 특징, 문화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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