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04
한자 月谷 禹拜善 倡義遺蹟碑
이칭/별칭 의병장 월곡 우배선선생 창의유적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34-9[상인동 881-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69년 - 우배선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21년 - 우배선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 건립
현 소재지 월곡역사공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34-9[상인동 881-1]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양식 귀부|비신|이수
관련 인물 우배선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303㎝|106㎝|76㎝
소유자 단양우씨 월곡문중
관리자 단양우씨 월곡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우배선의 유적비.

[개설]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月谷禹拜善倡義遺蹟碑)[의병장 월곡 우배선선생 창의유적비(義兵將月谷禹拜善先生倡義遺蹟碑)]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월곡 우배선[1569~1621]을 기리고자 1992년에 건립한 유적비이다. 우배선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마을에서 1569년에 태어난 인물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달성, 화원, 낙동강 지역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전공을 세웠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합천군수, 금산군수, 낙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낙동서원(洛東書院)에 배향되었다.

[건립 경위]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는 1992년에 우배선단양우씨(丹陽禹氏)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법학박사 강주진(姜周鎭)이 비문을 지었다.

[위치]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34-9[상인동 881-1]의 월곡역사공원 안에 있다.

[형태]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오석 재질의 비신은 높이 303㎝, 너비 106㎝, 두께 76㎝의 규모이다.

[금석문]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에는 ‘의병장 월곡 우배선선생 창의유적비(義兵將月谷禹拜善先生倡義遺蹟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우배선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등을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비슬산 기슭 월배 상인동임진왜란 때 24세의 백면서생으로 분기하여 화원현(花園縣) 의병장으로서 낙동강금호강, 달천과 감물천, 조암과 성평, 최정산(最頂山) 등지를 무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당시 대구 성주 지역 제일의 의병장이란 칭송을 받고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된 월곡 우배선 선생의 창의유적지이다./ 선생의 자는 사성 호는 월곡 본관은 단양으로 시조는 휘(諱) 현(玄)이며 역동선생(易東先生) 휘 탁(倬)의 9세손이요, 양호당(養浩堂) 휘 현보(玄寶)의 7세손이다. 고(考)의 휘는 성덕(成德)이니 증가선대부 호조참판이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아산장씨(牙山蔣氏) 휘 대신(大臣)의 여(女)이다. 선생은 조선 선조 2년(1569) 음 2월 2일에 당시 성주목 화원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출생하였다. 생후 1년에 부모를 여의고 조모 영일정씨(迎日鄭氏)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6세에 청도 외가에 가서 비로소 취학하였는데 총명이 뛰어나 학문에 뜻이 굳어서 명조(名祖)의 학통을 이어받기로 자부하였다. 16세에 월촌 본가로 돌아와서 가정을 돌보면서 연찬(硏鑽)에 정진하였으니 그의 그 주상치밀(周詳緻密)과 근검역행(勤儉力行)은 여리(閭里) 노소(老少)와 향당(鄕黨) 사우(士友)에 감복한 바 되었다. 24세가 되던 선조 25년(1592)에 왜적의 침입으로 군관이 연패함을 듣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대대로 국은을 입었으니 현재는 비록 받은 바 관녹은 없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신민으로서 국가의 위난을 좌시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기와 군량을 자체조달하는 한편, 정병 100여 명으로 화원현 의진(義陣)을 이루었다. 이때에 각기 자기 고장에서 창의한 고령(高靈)의 김면(金沔),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 등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한편,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백절불굴 누전무패의 전공을 세웠으니 당시 의병 진영으로서는 국내 막강의 병성(兵聲)을 떨치고 있었다. 선생이 진지에 나아가서는 포연탄우(砲煙彈雨)에도 두려움이 없었으며 ‘처지사지이후(處之死地而後)에 생(生)’이라는 신조로써 매양 제일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병사들을 아낌에 있어서는 친자질(親子侄)과 같이 애중하였다. 비슬산의 험준한 지세와 낙동강의 유역을 무대로 왜적이 나타날 때는 중과(衆寡)를 불문하고 돌격과 기습으로 유격전술을 발휘함으로써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화원 의진의 승전보가 용만(龍彎)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을 때에 선조는 기뻐서 ‘우배선’이란 이름을 벽에 써서 붙이고 한때의 시름을 달랬다 한다. 곽재우 장군은 전포(戰袍) 한 벌을 주면서 생사를 함께할 표증(表證)이라 하였고 이여송(李如松) 제독은 옥으로 만든 갓끈을 주어서 표상했는가 하면 그의 참모 여응종(呂應鍾)은 선생을 조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극찬하였다. 난정(亂靖) 후에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합천·금산·낙안 군수로 제수되어서 가는 곳마다 치적이 높아서 선정비가 서게 되었다. 광해조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덕동정사(德洞精舍)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광해 13년(1621) 12월 20일에 고종(考終)하시니 향년 53세였다. 묘는 성주군 벌지낙목암(伐智落木菴) 술좌(戌坐)이다. 숙종 34년(1708)에 덕동 유지(遺址)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하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고 현재는 낙동서원에 배향하고 있다. 배위(配位)는 철성이씨(鐵城李氏)이니 주부탕(主簿宕)의 여(女)이요 계배(繼配)는 서흥김씨(瑞興金氏)로 참봉 수열(壽悅)의 여(女)이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니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달해(達海)와 선교랑(宣敎郎) 달하(達河)이며 후손이 번창하여 대구시를 중심으로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선생의 사적(事蹟)이 벌써 400년을 지난지라 전란과 창상(滄桑)을 겪어 오는 동안에 표창의 의식을 갖추지 못하여 후손과 사림의 유한(遺恨)이 없지 않았더니 마침 후예들이 혈성(血誠)을 다하여 선생의 실기(實記)를 간행하고 이어서 사림에서 유적비를 세우려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니 불감(不敢)한 일이나 선대의 세의(世誼)가 남다른 처지라 삼가 붓을 잡았으나 세대(世代)의 침원(浸遠)과 기록의 인멸에서 선생의 충혼의백과 학덕고행을 완벽하게 나타내기 어려웠다. 다만 국조실록(國朝實錄)과 월곡실기창의유록(月谷實紀倡義遺錄) 및 본가의 가장(家狀)에 의하여 대강을 추려서 기록하는 바이다. 1992년 월 일// 법학박사 강주진 근찬(謹撰)/ 방후손(傍後孫) 상홍(相洪) 근서(謹書)/ 월곡우선생유적비건립추진위원회 근수(謹竪).[여기 琵瑟山 기슭 月背上仁洞은 壬辰倭亂때 二十四歲의 白面書生으로 奮起하여 花園縣義兵將으로서 洛東江과 琴湖江 達川과 甘勿川租巖과 省平最頂山等地를 舞臺로 赫赫한 戰功을 세워 當時 大邱星州地域第一의 義兵將이란 稱訟을 받고 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된 月谷禹拜善先生의 倡義遺蹟地이다./ 先生의 字는 師聖 號는 月谷 本貫은 丹陽으로 始祖는 諱玄이며 易東先生 諱倬의 九世孫이요, 養浩堂 諱玄寶의 七世孫이다. 考의 諱는 成德이니 贈嘉善大夫戶曹參判이오 妣는 貞夫人 牙山蔣氏 諱大臣의 女이다. 先生은 朝鮮宣祖 2年(1569) 陰2月 2日에 當時 星州牧花園縣 지금의 大邱市 達西區 上仁洞에서 出生하였다. 生後 一年에 父母를 여의고 祖母迎日鄭氏의 膝下에서 자라났다. 六歲에 淸道外家에 가서 비로소 就學하였는데 聰明이 뛰어나 學問에 뜻이 굳어서 名祖의 學統을 이어받기로 自負하였다. 十六歲에 月村本家로 돌아와서 家庭을 돌보면서 硏鑽에 精進하였으니 그의 그 周詳緻密과 勤儉力行은 閭里老少와 鄕黨士友에 感服한바 되었다. 二十四歲가 되던 宣祖二十五年(1592)에 倭敵의 侵入으로 軍官이 連敗함을 듣고, 憤慨하여 말하기를 우리 家門은 代代로 國恩을 입었으니 現在는 비록 받은바 官祿은 없다하더라도 이 나라의 臣民으로서 國家의 危難을 坐視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奮然히 일어나서 義兵을 募集하여 武器와 軍糧을 自體調達하는 한편 精兵百餘名으로 花園縣義陣을 이루었다. 이때에 各己 自己故庄에서 倡義한 高靈의 金沔 宜寧의 郭再祐 湖南의 高敬命 등과 聯合戰線을 構築하는 한편 招諭使金誠一과 體察使李元翼과 緊密한 連絡을 取하여 百折不屈累戰無敗의 戰功을 세웠으니 當時義兵 陣營으로서는 國內莫强의 兵聲을 떨치고 있었다. 先生이 陣地에 나아가서는 砲煙彈雨에도 두려움이 없었으며 處之死地而後에 生이라는 信條로써 매양 第一先頭에서 指揮하였고 兵士들을 아낌에 있어서는 親子侄과 같이 愛重하였다. 琵瑟山의 險峻한 地勢와 洛東江의 流域을 舞臺로 倭敵이 나타날때는 衆寡를 不問하고 突擊과 奇襲으로 遊擊戰術을 發揮함으로써 多大한 戰果를 거두었다. 花園義陣의 勝戰報가 龍彎의 行在所에 이르렀을때에 宣祖는 기뻐서 禹拜善이란 이름을 壁에 써서 붙이고 한때의 시름을 달랬다한다. 郭再祐將軍은 戰袍 한 벌을 주면서 生死를 함께 할 表證이라 하였고 李如松提督은 玉으로 만든 갓끈을 주어서 表賞했는가 하면 그의 參謀呂應鍾은 先生을 朝鮮의 代表的인 義兵將으로 極讚하였다. 亂靖後에 宣武原從勳에 冊錄되고 陜川金山樂安郡守로 除授되어서 가는 곳마다 治績이 높아서 善政碑가 서게 되었다. 光海朝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故鄕에 돌아와서 德洞精舍를 세우고 後學養成에 專念하다가 光海十三年(1621)十一月二十日에 考終하시니 享年五十三歲였다. 墓는 星州郡 伐智落木菴戌坐이다. 肅宗三十四年(1708)에 德洞遺址에 祠宇를 세워 祭享하다가 大院君때 毁撤되고 現在는 洛東書院에 配享하고 있다. 配位는 鐵城李氏이니 主簿宕의女이요 繼配는 瑞興金氏로 參奉壽悅의女이다. 膝下에 두 아들을 두었으니 通訓大夫 軍資監正達海와 宣敎郎達河이며 後孫이 繁昌하여 大邱市를 中心으로 各地에 分布되어 있다. 先生의 事蹟이 벌써 四百年을 지난지라 戰亂과 滄桑을 겪어오는동안에 表彰의 儀式을 갖추지 못하여 後孫과 士林의 遺恨이 없지 않았더니 마침 後裔들이 血誠을 다하여 先生의 實紀를 刊行하고 이어서 士林에서 遺蹟碑를 세우려하여 나에게 글을 請하니 不敢한 일이나 先代의 世誼가 남다른 處地라 삼가 붓을 잡았으나 世代의 浸遠과 記錄의 湮滅에서 先生의 忠魂義魄과 學德高行을 完璧하게 나타내기 어려웠다. 다만 國朝實錄과 月谷實紀倡義遺錄 및 本家의 家狀에 의하여 大綱을 추려서 記錄하는 바이다. 1992年 月 日// 法學博士 姜周鎭 謹撰/ 傍後孫 相洪 謹書/ 月谷禹先生遺蹟碑建立推進委員회 謹竪]”

[현황]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월곡역사공원 내에 있는데, 이 일대에서 600년을 세거하여 온 단양우씨 문중에서 세운 낙동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과 다양한 기념비 등과 함께하고 있어 역사공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월곡 우배선 창의유적비우배선의 생애와 임진왜란 당시 전투 상황, 역임한 관직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이를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의 전황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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