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극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364
한자 全克泰
영어공식명칭 Jeon Geuktae
이칭/별칭 형숙(亨叔),퇴헌(退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충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전극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85년 - 전극태 사산감역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95년 - 전극태 의성현령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96년연표보기 - 전극태 사망
출생지 달성 수성리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지도보기
수학지 남간정사 -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가양동 3]
부임|활동지 의성현 - 경상북도 의성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옥천(沃川)
대표 관직 의급도사|의성현령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전극태(全克泰)[1640~1696]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형숙(亨叔), 호는 퇴헌(退軒)이다. 할아버지는 전시헌(全時憲)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전유장(全有章)이고, 어머니는 이휴운(李休運)의 딸 영양이씨(永陽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최위남(崔衛南)의 딸 월성최씨(月城崔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윤기룡(尹起龍)의 딸 무송윤씨(茂松尹氏)이다. 전극초(全克初)·전극념(全克念)·전극화(全克和)·전극민(全克敏)이 동생이다. 다섯 형제가 모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활동 사항]

전극태는 1640년(인조 18) 달성(達城) 수성리(壽城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성장하여서는 동생들과 함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남간정사(南澗精舍)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전극화와 형제들이 충청도에 있는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 전유장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어서 송시열과 오가며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전극태는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2차 예송(禮訟) 논쟁에서 패배해 유배 갔을 때에도 편지를 주고받았고, 1689년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졌을 때에는 아우들과 함께 서울에 가서 상소문을 올려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전극태는 1685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함창현감(咸昌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95년에 의성현령(義城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1696년 근무지인 의성현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극태의 저술로는 『퇴헌집(退軒集)』과 『퇴헌일기(退軒日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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