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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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榮百 |
영어공식명칭 | Choi Yeongbae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6월 8일 - 최영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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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9년 8월 - 최영백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백의단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2월 15일 - 최영백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다혁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8월 - 최영백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2월 - 최영백 징역 2년 6월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 최영백 광복 후 출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최영백 대통령표창 수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최영백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몰년 시기/일시 | 2005년 7월 19일 - 최영백 사망 |
출생지 | 청주 모충동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
학교|수학지 |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다혁당 총부무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최영백(崔榮百)[1921~2005]은 1921년 6월 8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백의단(白衣團)과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최영백은 1939년 8월 대구사범학교 학생 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조강제(趙崗濟)·문덕길(文德吉)·김성권(金聖權)·최태석(崔泰碩) 등 2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백의단과 윤독회(輪讀會)를 중심으로 독서토론 모임을 지속하던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1940년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분석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0년 11월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1941년 1월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문예부와 연구회를 조직하였던 학생들 대다수가 졸업하면서 새로운 비밀결사가 필요해졌다. 최영백은 1941년 2월 15일 권쾌복·배학보·문덕길·최태석·김효식(金孝植)·이동우(李東雨)·유흥수(柳興洙)·이종악(李鍾岳)·이홍빈(李洪彬)·박호준(朴祜雋)·김성권·조강제·문홍의(文洪義)·이주호(李柱鎬)·서진구(徐鎭九)·이도혁(李道赫) 등과 함께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 다혁당을 결성하고 총무부장을 맡았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가택 수색 과정에서 윤독회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최영백도 이때 체포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1944년 2월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최영백은 2005년 7월 19일 사망하였다.
[묘소]
최영백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58-6]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영백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1998년 3월 1일에는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