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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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勞動會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노동운동 단체. .
[설립 목적]
대구노동회는 대구 지역 노동자의 지위 향상, 생활 안정, 상호 부조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변천]
대구노동회의 전신은 대구역 화물 운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친목계이다. 1923년 7월경 신재모·김광서·김학삼·서병하·김성곤·장춘동 6명이 주축이 되어 운수 노동자 약 30여 명을 규합하여 운수 노동자 친목계를 설립하였다. 대구역은 대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자, 각종 물산이 모여드는 집산지였다. 따라서 물건을 나르는 일용직 날품팔이 육체노동자가 밀집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노동공제회 회원 신재모가 이런 대구역 운수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단체를 결성하려고 하였다. 초창기에는 단체의 이름처럼 주로 친목계에 머물렀다.
대구역 화물 운반 노동자 약 400여 명은 1925년 10월 23일 오후 1시 만경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친목계의 명칭을 ‘대구노동친목회’로 변경하고, 회장으로 서병하(徐丙夏)를 선출하였다. 대구노동친목회에서는 1925년 7월 24일 시장정 대구노동친목회관 2층에서 위원회를 개최하여 회장 김광서, 부회장 김학삼, 당무 이덕우 외 3명, 서무부 권영규 외 25명, 구제부 임수복 외 39명, 교육부 김문학 외 1명, 회계부 강치운 외 2명, 경호부 장춘옥 외 4명을 뽑았다. 단체 회원 1500명이 소속된 대구노동친목회는 “단순한 친목회만이 아닌 이상 회명을 고칠 필요가 있다”라고 합의를 보고, 1927년 5월 29일에 총회를 열어 6월 1일자로 ‘대구노동회(大邱勞動會)’로 회명을 변경하였다. 대구노동회 회장 김광서(金光瑞)가 1932년 8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구노동회원들은 두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간부들의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대구노동회원들은 1932년 10월 5일 대구노동회 해소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노동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운반 노임 인하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1927년 11월에 대구 원대동 일대 정미소 노동자의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또 대구노동회는 상호부조 활동을 펼쳤다. 1928년 9월에 대구노동회는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다가 병사한 대구노동회 출신 이타관(李他官)의 유해를 송환하여 와서 안장하였다. 대구노동회는 노동자의 지위 향상을 위한 활동도 펼쳤다. 대구노동회는 회원 대다수가 일용 육체노동자들로 자녀 교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자립적으로 노동학원을 개설하고자 하였다. 1928년 2월 6일 건립 기금 1만 원을 모금하고 대구노동학원(大邱勞動學院)을 세울 부지 2,700평[약 8,925㎡]을 확보하였다. 그렇지만 학교 설립이 순조롭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1930년대 대구노동회 간부의 배임·횡령과 같은 비리와 부정부패, 대구노동회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대구노동학원은 완공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으며, 1938년에 대구부로 귀속되었다. 1929년 일제강점기의 한국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인 원산총파업에 동조하여 동맹파업을 진행하였다. 또 대구노동회 회장 김광서·이승준은 직접 원산에 가서 총파업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노동회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대구 지역 노동운동을 이끌어 낸 대표적 사회운동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