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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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育齋 |
영어공식명칭 | Nagyuk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세욱 |
건립 시기/일시 | 1721년 - 낙육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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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730년 - 낙육재 중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07년 - 낙육재 증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58년 - 낙육재 중건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06년 - 낙육재 철폐 |
이전 시기/일시 | 1990년 - 낙육재 재건 |
현 소재지 | 낙육재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원소재지 | 낙육재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교육기관 |
양식 | 맞배지붕|통칸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4칸 |
소유자 | 대구향교재단 |
관리자 | 대구향교재단 |
[정의]
조선 후기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립하여 운영한 교육기관.
[개설]
낙육재(樂育齋)는 1721년(경종 원년) 경상감사 조태억(趙泰億)[1675~1728]이 대구읍성의 남문 밖[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설치한 학교이며, 경상감영이 운영하였다. 경상도 내 각 지역의 수령들로부터 추천받은 유생들을 감영 앞에 모아 선발시험을 치른 뒤 30명을 뽑았고, 두 개 반으로 나누어 1개월씩 번갈아 1년 동안 교육과 숙식을 제공하였다. 낙육재의 ‘낙육’은 『시경(詩經)』「소아(小雅)」 편 「청청자아(菁菁者莪)」의 “청청자아는 인재 기르는 것을 즐거워한 시이니, 군자가 인재를 기르면 천하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菁菁者莪 樂育材也 君子能長育人材 則天下喜樂之矣]”라는 구절에서 뜻을 취하였다.
[위치]
낙육재는 중구 남산동 735-4에 있다.
[변천]
낙육재는 1721년 조태억이 창건한 이후 1730년 조현명(趙顯命)이 중창하였다. 이후 1808년 윤광안(尹光顏)이 강론소인 관선당(觀善堂)과 도서관인 장서각(藏書閣)을 증축하였다. 1858년 조병준(趙秉駿)이 낙육재를 중건하였고, 1889년 김명진(金明鎭)이 당우(堂宇)를 개선하였다. 1896년 엄세영(嚴世永)이 관선당을, 1903년에는 장서각을 수리하였다. 낙육재는 1906년에 철폐되어 1909년 대구 협성학교 설립 재원으로 흡수되었다. 1990년 10월 대구향교 경내에 복원되었다.
[형태]
낙육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건물 안은 통칸으로 되어 있다.
[현황]
낙육재는 1990년 10월 7일 대구광역시 보조금 및 대구향교재단의 자체 자금으로 대구향교 경내에 재건되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