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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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顧母嶺 |
영어공식명칭 | Gomoryeong in the rai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혜경 |
창작|발표 시기/일시 | 1948년 - 「비 내리는 고모령」 창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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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 시기/일시 | 1949년 - 「비 내리는 고모령」 발표 |
성격 | 대중가요 |
작곡가 | 박시춘 |
작사자 | 유호[호동아] |
연주자(가수) | 현인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에 있는 고모령 고개를 주제로 1949년 발표된 가수 현인의 노래.
[개설]
「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의 ‘고모령’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에 있는 고개로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에 고개 령(嶺) 자의 합성어이다. 고모령에 얽힌 전설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옛날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지나가던 스님이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서 현재 가난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하여 흙으로 산을 쌓는다. 그때 쌓은 산봉우리가 오늘날 모봉, 형봉, 제봉 세 개의 산봉우리이다. 그런데 서로 공덕을 더 많이 쌓으려는 욕심에 남매가 높이 산을 쌓으려고 싸우는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집 나온 어머니가 하염없이 걷던 길이 현재의 고모령길이고, 고개 정상에서 집을 뒤돌아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하여 고모령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둘째는 일제강점기 징병 가는 젊은이들이 탄 열차가 고모령을 넘어가는데 당시 증기기관차가 높은 경사의 고모령을 한 번에 넘지 못하여 고모령 부근에서 열차가 더디게 운행하였다. 그러자 징병 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감옥에 갇힌 독립투사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고모령 고개를 넘으면서 아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는 전설에서 ‘뒤돌아보는 어머니의 고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모령 고개에 담긴 어머니의 심정을 담아 「비 내리는 고모령」이 창작되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고모령 고개를 주제로 박시춘이 작곡하고 호동아가 작사한 가수 현인의 노래이다. 1948년 창작되었고, 1949년 발표되었다.
[공연 상황]
「비 내리는 고모령」은 1960년대 재취입된 음반에서 성우 이창환과 고은정이 모자간의 대화를 정겹게 엮어 노래하였으며 노랫말도 개사되었다. 개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런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구성]
「비 내리는 고모령」은 어머니와 헤어져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슬픈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내용]
「비 내리는 고모령」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는 그날 밤을 언제 넘느냐/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장명등이 깜빡이는 주막집에서/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오늘 밤도 불러본다 어머님의 노래
[현황]
「비 내리는 고모령」은 1969년 같은 제목으로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대구광역시에서는 「비 내리는 고모령」을 기념하는 기념관과 고모역을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20년 대구광역시 수성구의회에서 ‘고모역 복합문화공간 활성화 사업’에 투자 및 지원을 확대하였다. 현재는 고모역 앞에 같은 이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비 내리는 고모령」은 고모령에 얽린 전설과 어머니와 자식 간에 이별하는 심정을 잘 헤아려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으며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