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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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在 |
영어공식명칭 | Lee Bongj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봉재(李鳳在)[1907~]는 1907년 6월 9일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이봉재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2월부터 10월까지 마르크스사상을 연구하는 사상강좌회에 참여하였다. 11월 15일 사상강좌회 강사이던 장홍상(張弘相)[이명 장적우(張赤宇)]의 비밀결사 결성 제안을 수용하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대구공립중학교·대구농림학교 학생들과 함께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였다. 이봉재는 제2그룹의 책임 겸 교남학교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우동맹은 12월 27일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혁우동맹(革友同盟)으로 조직을 전환하고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압박민족의 절대 승리를 기한다’라는 표어를 채택하였다.
이봉재는 1928년 2월 26일 혁우동맹이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전환할 때 가담하였고, 1928년 3월 윤장혁(尹章赫) 등이 졸업하고 난 뒤 김승한(金承漢)과 함께 출판부를 맡았다. 1928년 2월 26일 혁우동맹원들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 ‘모순된 사회현상 타파’, ‘만인 평등 신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는데, 이봉재는 조사부를 맡았다. 적우동맹은 4월 30일에 ‘맑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학생운동을 실천적으로 행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일우동맹(一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다.
1928년 3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사가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생들은 학생 자치, 희생자의 복교(復校), 일본인 교사 파면, 교장 실책 인정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투쟁으로 인하여 대구 지역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어 이봉재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고,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형이 확정되어 출소하였다.
이봉재는 출소 후 고향인 양산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양산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양산농민조합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맡았다. 1932년 3월 14일 양산군 상북면 석계리와 대석리 일대에서 농민조합 가입을 권유하고 농민의 권익 보호를 쟁취하자는 연설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류 25일 처분을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봉재 일행의 구류 조치는 3월 16일 양산농민조합원들의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으로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