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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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星達 |
영어공식명칭 | Kim Sungda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 김성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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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60년 9월 - 김성달 경북시국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11월 26일 - 김성달 경북민족통일연맹 부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2월 25일 - 김성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3월 1일 - 김성달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주도 |
출생지 | 남성로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
학교|수학지 | 대구고등실수학교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통일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경북민족통일연맹 부위원장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통일운동가.
[개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시국대책위원회와 경북민족통일연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면서, 자주적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범시민운동단체의 성격을 가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협회의의 결성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벌인 민족통일운동가이다.
[활동 사항]
김성달은 1960년 9월 경북시국대책위원회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1월 12일 위원장 안경근, 기획부장 안민생 등과 함께 대구 종로초등학교에서 3,000여 명이 참석한 통일문제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1월 26일 경북시국대책위원회를 경북민족통일연맹[민족통일경북연맹]으로 확대 개편할 떼 부위원장이 되어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경북민족통일연맹 결성대회’에서는 남북 간 서신 왕래의 자유, 경제적 교류, 문화 교류 등의 통일 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과 선전문이 채택되었다.
김성달은 1961년 자주적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범시민운동단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회의 결성에 적극 개입하였고, 2월 1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 준비위원 장상호에게 결성대회에 사용할 현수막과 선전물 인쇄비용으로 500만 원을 제공하였다. 2월 25일 서울 천도교 회당에서 개최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경북 대표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선통일 후건설 통일론을 거부하며 남북 교류와 평화적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1961년 2월 25일 경북민족통일연맹 상임집행위원회에서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달성공원에서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는 남북 교류, 평화통일이 제기되었다. 김성달은 궐기대회 후 참가자들과 함께 현수막과 차량을 앞세우고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와 중앙통을 거쳐 반월당까지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김성달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1962년 1월 9일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