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207
한자 鄭雲海
영어공식명칭 Jung Woonhae
이칭/별칭 이경진(李景珍),이봉화(李奉華)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 9월 14일연표보기 - 정운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정운해 대구 협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 정운해 대한독립의군부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 정운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의사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정운해 북성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4월 - 정운해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4월 17일 - 정운해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정운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5월 18일 - 정운해 만기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정운해 조선건국동맹 경상북도 책임자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45년 10월 27일연표보기 - 정운해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정운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서성로2가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중국 - 중국
활동지 일본 - 일본
묘소 정운해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운해(鄭雲海)[1893~1945]는 1893년 9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에서 정만원(鄭萬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경진(李景珍)·이봉화(李奉華)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정운해는 1913년 대구 협성학교를 졸업한 뒤 경상북도 청도의 사립 문명학교와 달성의 산격학교 교사를 지냈다. 1919년 2월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결성에 참가하고 선전 겸 연락을 담당하였다. 정운해3·1운동 발생 직후인 1919년 3월 10일 무렵 대한독립의군부의 국내 자금모집원으로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다.

정운해는 대구에서 홍주일(洪宙一)의 동생 홍기식(洪基植)을 통하여 재건 달성친목회서상일(徐相日)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에 대하여 협조를 요청하였다. 정운해는 1919년 4월 무렵 정계원(鄭啓源)이라는 가명으로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서상일에게서 소개받은 경남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를 방문하였다. 1919년 6월 무렵 재건 달성친목회 활동이 일제 경찰에 게 발각되자 정운해는 서울로 피신하였다. 이후 1920년 4월 무렵 전국적 노농운동 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의사원이 되었다. 1920년 5월 27일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20년 6월 6일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는 데 일조하였다.

정운해는 1922년 9월 일본 니가타현[新瀉縣]에서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재류조선노동자상황조사회의 일원이 되어 조사 활동을 벌였고, 11월에 「재일본노동자의 상황」이란 제목으로 조사 결과를 잡지 『신민공론』에 발표하였다. 1922년 12월 김종범·김약수 등 일본재류조선노동자상황조사회 간부들과 함께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조선노동자동맹창립대회에 참석하였고, 1923년 1월 사상단체 북성회(北星會)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정운해는 1923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정기총회를 주도하여 단체명을 대구노동공제회로 변경하였고, 조직 체계도 회장제에서 위원제로 바꾸었다. 정운해는 1923년 3월 대구노동공제회가 본격적 농민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개최한 농민대회에서 소작운동에 관한 방침이 담긴 선언서와 결의 사항을 낭독하였다. 1923년 5월에는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대구노동공제회의 주요 구성원들과 함께 소작인조합 결성에 필요한 규약 등과 면 단위 소작인조합 결성을 결의하였다. 정운해는 1923년 평양 양말직공의 동맹파업을 지원하고 9월 30일 서울로 돌아오다가 최창익 폭행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정운해는 1924년 1월 경산남도 진주에서 열린 경남도노농운동자간친회(慶南道勞農運動者懇親會)에 참가하여 소작농민의 단결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으며,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 창립준비위원이 되어 1924년 3월 9일부터 이틀간 대구 만경관에서 열린 창립총회 개최를 주도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창립총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정운해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의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편집부를 맡았다. 또한 대구 지역 37개소의 이발소 직공이 모인 이발직공조합의 창립을 도왔으며, 12월에는 대구역 주변의 ‘삐끼’ 모임인 도리우찌단이 사상단체 수양단으로 전환하는 데 주도적이 역할을 하였다. 1925년 7월 서만달·서상일과 함께 대구농촌사를 설립하여 서무를 맡았고, 대구신문배달조합과 대구재봉직공청년회의 결성을 도왔다.

정운해는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노농부를 맡았다. 6월 무렵 김종범과 함께 코민테른에 화요파 중심인 조선공산당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였고, 1925년 11월 당 중앙으로부터 종파 행위로 간주되어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정운해는 1925년 1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일본부의 연락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정운해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1년 5월 18일 만기 출소하였다.

정운해는 출소한 뒤 우인들의 도움으로 신탄업에 종사하였고, 1944년 무렵 조선건국동맹 경상북도 책임자가 되었다. 정운해는 1945년 7월경 조선건국동맹 활동으로 다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미결수로 공판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에도 참여하였다. 미군정청 경상북도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정운해는 1945년 10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정운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운해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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