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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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厚性 |
영어공식명칭 | Park Huseong |
이칭/별칭 | 박금동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판소리 국악인.
[개설]
박후성(朴厚性)[1922~?]은 1922년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대구에서 창극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원래 이름은 박금동(朴金童)이다.
박후성은 일제강점기에 성원목(成元睦)과 박화섭(朴化燮), 박동실(朴東實) 등에게 소리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화랑창극단과 동일창극단, 한일창극단, 조선창극단 등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후 국극협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대에 대구에서 대동국악사와 국악사를 설립하였으며, 제4대 국립창극단 단장[1982~1990]을 지냈다.
[활동 사항]
박후성은 1937년부터 2년 동안 광주에서 성원목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18세에 1년 동안 박화섭에게 「춘향가」를 배운 후 경주에서 활동하였다. 20세 무렵에 광주로 돌아와서 전남 담양군 남면의 지실초당에서 박동실에게 「춘향가」와 「심청가」, 「적벽가」를 3년 동안 배웠다. 17세에 화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창극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동일창극단에 참여하여 「일목장군」에 출연하였다. 해방 후 광주의 박동실국극협단에 들어가 활동하였으며, 1950년대에 대구에서 대동국악사와 국악사를 설립하여 단장을 지냈다.
박후성은 1951년 1월 대구에서 한일섭, 장영찬, 공기준, 박초향, 이귀조, 박홍도, 남해성, 박신숙과 신극 출신의 남민, 허빈, 전해원 등을 단원으로 대동국악사(大同國樂社)를 창립하였다. 창립 작품으로 이일파의 「오월몽(五月夢)」을 대구 만경관에서 공연하였으며, 추석 때는 허빈의 「검백(劍白)과 공주(公主)」를 공연하였다.
박후성은 1951년 말, 경남지구 정훈공작대 단원이던 김원길, 신봉학, 허희와 전 국극사 단원이던 오태석, 성원목, 홍갑수, 박도아, 성순종 등이 대동국악사에 참여하게 되어 창극단의 면모가 일신되자 단체명을 국악사(國樂社)로 바꾸었다. 그 후 순흥창극단이 해산하여 주광득, 배금찬, 김록주, 성옥란, 김준옥 등의 입단으로 진용이 더욱 강화되었다. 국악사는 박황 작 「님은 가시고」를 대구극장에서 상연하면서 새 출발을 하였으며, 1953년에 허빈 작 「백호성(白虎城)」·「서라벌의 재성고(再聲鼓)」, 박황 작 「운곡사의 비화」·「일편단심」·「사도세자」 등을 상연하였다. 대동국악사와 국악사는 주로 대구극장과 만경관에서 창극을 상연하였다.
박후성은 1970년에 국립국극단[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제4대 국립창극단 단장[1982~1990]을 지내며 「심청」 등 여러 작품을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 창극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후성은 국립창극단 단장 재임 당시 여러 편의 창극을 국립극장 무대에 올렸다. 대표적인 작품은 1982년의 「심청」과 「흥보전」, 「춘향전」, 1983년의 「토생원과 별주부」와 「부마 사랑」, 1984년의 「심청가」와 「서동가」, 「흥보가」, 1985년의 「적벽가」와 「광대의 꿈」, 1986년의 「수궁가」와 「윤봉길 의사」, 1987년의 「토끼타령」과 「춘향전」, 「두레」, 1988년의 「흥보전」과 「배비장전」, 1989년의 「춘풍전」과 「심청가」, 1990년의 「흥보전」과 「황진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등이다.
[상훈과 추모]
박후성은 1982년 국립창극단 창단 20주년 기념표창[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