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647 |
---|---|
한자 | 城下里 遺蹟 |
영어공식명칭 | The Ancient Site at Seongha-ri, Dal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 147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창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에 있던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성하리 유적(城下里遺蹟)은 4대강 살리기의 일환으로 실시된 달성 도동 지구 외 4지구의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으로 인해 발굴 조사되었다.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 부지는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풍읍 성하리, 논공읍 상리·하리, 옥포읍 본리리, 하빈면 동곡리 일원으로 낙동강 중하류의 동안에 위치한다. 성하리 유적은 국도 5호선을 따라 대구광역시에서 달성군 현풍읍으로 가다 보면 논공 IC 진입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의 동편에 형성된 '봉개울골' 계곡부의 남쪽과 능선 비탈 일대에 해당된다. 서쪽에는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연결되는 박석진교가 있고, 낙동강과는 300m 정도 이격되어 있다. 유적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충적지면서 낙동강 범람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홍수 시 낙동강 범람의 영향과 함께 북동쪽에 위치한 '섯밭등'을 따라 이어지는 산지와 연접하고 있어 봉개울골에서 발원한 소하도의 영향이 동시에 미치는 지대이다. 조사 전 유적 내의 경작지는 능선 방향과 나란하게 계단상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1918년도에 발행된 지도를 보면 현재의 지형과 변화가 없으며, 당시에도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성하리 유적은 삼한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 지구를 포함한 4개 지구[구지면 도동리, 논공읍 상리·하리, 옥포읍 본리리, 하빈면 동곡리]에 대한 지표 조사[347만 2000㎡]는 2010년 2월 26일부터 그해 4월 6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성하 지구에서 삼국 시대~조선 시대의 유물 산포지가 확인된 범위 4만 4000㎡에 대해서는 매장 문화재 분포 확인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동년 4월 15일부터 같은 해 7월 9일까지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민무늬 토기편과 고려 시대의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고, 확인된 범위[4,970㎡]에 대해서 그해 8월 11일부터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후 동쪽 경계부 바깥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터가 연결되어 있어 750㎡를 추가[총 5,720㎡]로 조사하여 동년 12월 27일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조사 결과 통일 신라 시대의 집자리 5동·수혈 7기·건물 터 2동·고상식 건물 1동·주혈군 3개소·주혈 111개·도로 2기·부석 1기·구상 유구 15기와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건물 터 1동·수혈 1기·부석 1기·구 2기 등 총 152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 토기 발·항아리[호]·병·파수·기와·청자·분청사기·백자 등의 토도류 155점, 납석제 접시[완]·돌절구[석구] 등의 옥석류 2점, 청동 숟가락·철정 등의 금속류 15점 등 총 172점이다.
유적 내 남북 토층을 보면 남쪽은 황갈색 풍화 암반토가, 저지대인 북쪽은 퇴적토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으며, 유구들은 모두 해발 19.5m 이상에서 조사되었고 중복 관계를 이루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북동 비탈에서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인 4호를 제외하고는 유구 간의 중복과 계단식 경작으로 인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5호에서 고래 시설과 배수로가 확인되었는데, 고래는 서벽에 접하여 천석 및 할석과 점토를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배수로는 벽면을 따라 바닥을 굴착하였으며 북쪽 외역으로 이어지도록 조성하였다. 2호·3호·4호는 중앙에서 화덕 자리[노지]가 각 1기씩 확인되었는데, 모두 무시설식으로 내부에는 소토 알갱이가 2~4㎝ 채워져 있었다. 유물은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 굽 접시[대부완], 연질 접시 등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잔편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터는 모두 2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서쪽에 고래 시설이 있다. 1호는 북동쪽에서 구덩식 진단구가 확인되었고, 청동 숟가락·철정·쇠손칼[철도자] 등의 철기류 15점이 서로 뒤엉켜 붙어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도로는 모두 2기가 확인되었는데, 1호는 유적의 비탈 동쪽에 위치하며 현재 규모는 길이 21.05m, 너비 5.3m, 깊이 1.03m이다. 수레바퀴 간의 간격은 200~240㎝, 바퀴 폭은 10~25㎝, 깊이는 5~13㎝로 다양하다. 수레바퀴 흔적의 진행 방향은 대부분 남북 간이지만 일부 엇갈리게 확인되는 것도 있다. 2호는 유적의 비탈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 규모는 길이 22.4m, 너비 2.4m, 깊이 0.73m이다. 수레바퀴 간격은 130~135㎝, 바퀴 폭은 10~25㎝, 깊이는 4~11㎝이다. 수레 바퀴 흔적의 진행 방향은 남북 간으로 대부분 동일한 방향으로 확인된다. 도로는 그 방향이 모두 유적 북쪽에 위치한 봉개울골의 계곡부에서 '구쌍산'의 남서쪽 비탈로 진행되는데, '구쌍산'의 남쪽 비탈 일대에는 성하리 고분 떼가 위치하고 있어 고분 떼 집단에서 필요한 물자를 수송함과 더불어 낙동강과 인접한 교통로 등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성하리 유적은 낙동강의 범람원에 형성된 충적지와 배후 구릉부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인간의 주거 생활과 생산 활동에 필요한 기반 시설 및 교통로 등에서 아주 유리한 지점에 입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집자리 및 도로는 동 시기 타 지역과의 비교·분석을 행할 수 있는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져, 이 일대에서 조사된 기존 자료들과 더불어 유적이 조성된 당시 지역 집단의 종합적인 실생활상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진척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