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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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認[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Choi In |
이칭/별칭 | 달부,한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한천(寒川). 6대조 할아버지는 개국 공신인 광정공(匡靖公) 최단좌(崔鄲佐)이며, 5대조 할아버지는 지현(知縣) 최맹연(崔孟淵)으로 대구에 처음 거주한 입향조이다. 고조할아버지 최한(崔澣)은 참군(參軍)을 지냈으며, 증조할아버지 최자하(崔自河)는 감역(監役)을 지냈다. 할아버지 최해(崔海)는 만호(萬戶)를 지냈고, 아버지 최종옥(崔宗沃)은 감찰(監察)이었다.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하희수(河希壽)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로서 하연(河演)의 후손이다. 부인은 참봉 한형(韓衡)의 딸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로서 부호군(副護軍) 최동립(崔東岦)과 장사랑(將仕郞) 최동은(崔東嶾) 형제를 두었다. 손자인 최진남(崔鎭南)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
[활동 사항]
최인(崔認)[1559~?]은 일찍이 대곡(大谷)[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대곡지 부근]에 집을 짓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불골사 동고록」에 의하면 불골사(佛骨寺)에서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송암(松巖) 홍한(洪澣),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모계(茅溪) 문위(文緯), 이삼한(李三韓), 인심재(忍心齋) 김응하(金應河),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 최계종(崔繼宗), 달서재(達西齋) 채선수(蔡先修), 박영수(朴英遂), 최근(崔瑾), 장응기(張應起), 박문(朴𣼶), 백상엄(白尙嚴)과 더불어 공부하였다.
1588년 9월 9일에는 최계, 최동보, 채몽현, 서재겸, 서영복, 정세아, 조형도 등과 용문 고개를 노닐고 시를 지었다. 1592년(선조 25) 2월 권응수(權應銖), 서진화(徐震和), 장몽기(張夢紀), 최동보, 최계, 신해(申海), 권응추(權應錘), 손진(孫進), 백상엄, 최대기(崔大器), 김인복(金仁復), 박수영(朴秀英) 등과 함께 오강(烏江) 금정(琴亭)에서 창의하고, 그 해 4월 13일에 장몽기와 와룡산(臥龍山) 아래에 진을 치고 남쪽에서 밀려오는 왜적을 화원(花園) 일대의 길에서 물리쳤다.
1596년 9월 22일 이눌(李訥)이 정병 800명을 이끌고 팔공산에 진을 치자, 이에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합류하였다. 9월 28일에 팔공산 진영에 참여한 의병장들이 회맹록을 작성하였다. 이것이 「팔공산 회맹록」이다. 「화왕산성 동고록」에 의하면 1597년 7월 9일에는 창녕 화왕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곽재우(郭再祐)의 진영에 합류하여 산성을 수비하였다. 8월 29일 왜구가 팔조령으로 몰려오자, 관찰사 이용순, 병마사 김응서가 열읍에 관문을 내었다. 이에 의병들이 일제히 운집하여 달성으로 나아가 왜구와 맞서 싸웠다. 최인은 최계, 최동보, 김윤득(金允得), 조성(曺城), 최대기, 신해 등과 700명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묘소]
대구부 해서촌(解西村) 대곡(大谷) 해좌(亥坐)에 장례를 지냈다. 오늘날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대곡지 부근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1812년[순조 12] 5월 25일에 지평(持平)에 증직되었고, 1828년에 삼충사와 묘정비를 세웠다. 1900년 묘소 아래에 원모재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