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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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楊氏 |
영어공식명칭 | Cheongju Yang Clan|Cheongju Yangss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양기를 시조로 하고, 양득효를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세거 성씨.
[개설]
양기(楊起)를 시조로 하는 청주양씨는 양득효(楊得孝)[1572~1645]가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달성군 다사읍 달천리 달래 마을과 하빈면 하산리 너울티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연원]
양기의 호는 암곡(巖谷),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원나라 출신으로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서 고려에 들어왔다. 원에 바치는 세공(歲貢)을 삭감한 공으로 벽상삼한 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다. 본관을 청주로 사관(賜貫)하여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
대구 지역에 청주양씨가 입향한 것은 양득효 때의 일이다. 양득효의 아버지는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낸 양흡(楊洽), 어머니는 손사겸(孫思謙)의 딸 숙부인(淑夫人) 밀양 손씨(密陽 孫氏)이다. 부인은 이경성(李景星)의 딸 숙부인 함안 이씨(咸安李氏)와 숙부인 달성 서씨(達城徐氏)다.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관직은 용양위 부사과 겸 훈련원 판관(龍驤衛副司果謙訓鍊院判官)을 지냈다. 양득효의 선대는 경기도 포천과 그 일대에 세거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양득효가 처음으로 경상도 대구 도호부로 이주하였으며,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천리 달래 마을에 정착하였다.
[현황]
1998년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가 편찬하고 달성 문화원에서 간행한 『달성 마을지』에 따르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는 총 69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42가구가 청주양씨라고 한다.
[관련 유적]
묵재(默齋) 양찬(楊纘)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극진한 효성으로 모친을 모셨으며, 벼슬을 단념한 채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힘써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천리 달래 마을 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묵정재(默庭齋)는 청주양씨 후손들이 그를 위하여 1787년(정조 9)에 처음 건립하였고, 1890년(고종 27)에 재건한 재실(齋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