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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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영어공식명칭 | Funeral rites |
이칭/별칭 | 장례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 지역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 지내는 예법.
[개설]
상례(喪禮)는 사람이 태어나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죽음을 처리하고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의례이다. 즉, 죽음을 맞고 그 주검을 갈무리해 장사를 지내고, 근친들이 죽은 이를 슬픔을 다해 기리는 의식의 절차이다. 유교식 상례의 근본은 차이가 없으나, 환경과 상황 및 지역에 따라 그 시행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달성군에서는 '가가례(家家禮)'라고 하여 집안, 지역, 학자에 따라 의례가 다르지만 세부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상례 역시 유교식으로 일원화한다. 초기부터 숭유 억불 정책에 따라 7품 이하 관료에게 의무적으로 『가례(家禮)』를 시험 보게 하고,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경국대전(經國大典)』[1485]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모든 제도와 의례를 유교식으로 전환한다. 상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16세기 초반부터 이미 조선식 예서(禮書)가 등장하였고, 성리학자의 예학 연구와 실학자의 실천 예학 연구 등 유학자의 솔선수범으로 유교식 상례는 점차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유교식 상례 는 완전한 조선의 상례 문화로 정착하여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 화장이 도입되고 「의례 준칙」[1934]이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상복의 변화, 상기(喪期)[상복을 입는 기간]의 단축 등 전통 의례를 강제하면서 상례의 문화적 전통이 위기에 봉착한다. 그럼에도 1900년에 『사례편람(四禮便覽)』이 증보되고, 그 이후에도 계속 출판되어 문화적 전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1969년 대한민국 최초로 「가정 의례 준칙에 관한 법률」[1969]과 함께 「가정 의례 준칙」이 공포되고, 1999년 개정된 「건전 가정 의례 준칙」에서 현재까지 국가가 간소화를 명분으로 일생 의례로서 개인의 의례를 규제하였지만, 문화적 전통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일상생활의 변화로 상기의 단축, 상복의 변화 등 많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장례식장과 상조 회사(相助會社)의 장례 지도사가 상례를 대행하면서 의례의 전문 직업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삼년상 절차]
죽음을 보는 종교적 견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빨리 시신을 처리하여 이승과 분리하는 것이 의례의 핵심이 된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조상 숭배를 위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견해로, 고인을 조상으로 승화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의례를 치른다. 유교식 삼년상이 이러한 의례의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상례는 고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의례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여 가계 계승을 정상화하는 의례적 장치이기도 하다. 초종(初終)에서 급묘(及墓)까지가 죽음을 처리하는 장사(葬事)라면, 우제(虞祭)에서 길제(吉祭)까지는 고인을 조상신으로 승화하고, 상주가 일상으로 돌아와 가계를 계승하는 상례였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삼 년이라는 기간을 요구한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졸곡(卒哭)에서 무시곡(無時哭)을 그치고,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에서 연복으로 상주의 슬픔을 경감하며, 빈소(殯所)를 철거하여 일상으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 또한, 담제(禫祭)를 지내면서 완충 기간을 두고, 길제를 지내면서 상주의 의무를 마친 주손(冑孫)[맏손자]으로 주인의 역할을 바꾸면서 삼년상을 마무리한다.
[오동계의 특징]
달성 지역의 전통 촌락에는 장례를 치르기 위한 의례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흔히 상포계 혹은 상여계라고 부른다. 전통 문화가 해체되고 있는 지금도 상포계는 전승되고 있는 마을이 많다. 그만큼 사람이 죽으면 상례부터 장지에 매장하기까지 많은 일손과 협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에는 공동 재산으로 상여채를 관리하였지만 지금은 장의사와 전문 장례식장이 발달하였고, 상여를 매는 풍습이 사라지면서 인적 구성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달성군 유가읍 금 1리, 금 2리, 금 3리와 유곡 2리 주민들의 '오동계(五洞契)'는 이러한 전통의 전형적인 상포계라 할 수 있다. 오동계는 네 개의 행정리, 행정동을 통합하는 조직이며,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장례를 공동으로 치르는 공동체 조직이다. 오동계는 달성군 유가읍 금리 마을 뒷산인 오동산을 공공의 재산으로 확보하고 공동 묘지로 활용한다. 계원이나 비계원이 오동산을 장지로 활용할 때 일정한 금품을 받아 공동 재산으로 적립하고 있다. 계원이 상을 당하면 오동산에 매장을 하고 협동하여 장례를 치르는 조직이다. 계원의 자격은 장남에게 세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