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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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健康 - 大邱 藥令市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에 형성된 한약재 특화거리.
[개설]
조선시대였던 1658년(효종 9)부터 이어져 온 약재시장이 있다. 약전골목은 입구부터 풍기는 각종 약재의 향기들로 가득하다. 대구 약령시에 들어서면 약재를 파는 곳과 한의원, 한약방, 한약제탕소 등 200여 곳이 밀집하여 있다. 가게마다 쌓여 있는 약재들 사이로 작고 낡은 팻말이 이름을 밝히고 있어 골목이 지닌 세월을 확인할 수 있고, 신뢰감을 높인다. 약재 한 가지만 다루는 전문 시장이 형성되어 수백 년간 지속된 것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약령시를 걷다]
대구 약령시가 세워진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마련하기 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1658년에 설치되었다는 설이 첫 번째이다. 약재의 효과적인 채집을 위하여 조선 조정과 대구 지방의 계획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생산자와 중개상 간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도매시장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다.
두 번째 설은 인근 국가들인 중국, 일본과의 한약재 무역을 위하여 설치되었다는 설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지방에서 약재가 풍부하게 산출되어 왔다. 대구와 가까운 경산, 영천, 경주, 성주, 고령, 합천, 칠곡, 군위, 선산, 의성, 안동, 김천, 상주, 문경, 예천, 봉화, 영양 등이 모두 한약재로 이름난 지역이다. 지리적 특성상 낙동강과 금호강이 인접한 대구는 경상도 약초 생산지들을 이어 주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상인들이 교류하기에 좋았다. 게다가 경상도 약재에 대한 중국에서의 호응이 높았으며 일본에서도 조선 약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대구 약령시가 발달하였다는 주장이다.
두 가지 설 모두 대구 약령시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약재시장이 처음 열리던 당시의 위치는 경상감영 서쪽 객사 주변이었으며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에 있는 중부경찰서 북편 일대라 할 수 있다. 1년에 두 번, 한약재의 채취 및 출하 시기에 맞춰서 봄과 가을에 한 달간 열리던 약령시는 점차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07년 장소 이전이 결정되는데, 급기야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하여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오늘날의 약전골목이 있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일대로 이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고 격동의 근현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대구 약령시의 운명도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우선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가 발동한 「조선시장 규칙」에 따라 시장이 세 분류로 나뉘면서 일본의 지배구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행정관청의 기관장만이 시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조선시장 규칙」에 따라 행정관청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제1호 상설 시장 또는 정기시장, 제2호 공설시장, 제3호 위탁 또는 경매시장 등으로 나누어 관리됨으로써 자유로운 시장의 기능이 위축된 것이다. 일제가 개설하고 주도하는 시장에서 인삼과 같은 귀한 약재들이 거래되면서 기존의 약령시는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구처럼 전주, 원주 등에도 약령시가 생겨 났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살아남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유력한 한약종상 양익순(梁翼淳)의 주도로 1923년에는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가 조직되었으며, 약령시진흥동맹회를 중심으로 ‘대구약령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덕분에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와 약재를 구하는 등 대구 약령시는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구 약령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연락의 거점이 되면서 조선의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약령시의 상인들은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발과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주는 일이 잦았다. 자연히 일제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다가 결국 1941년에는 약령시가 폐쇄되기에 이른다.
1945년 광복 이후 약령시는 다시 장을 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간 이후 겨우 살아남은 대구 약령시는 한약재 상설 시장으로 거듭나 명맥을 잇게 되었다. 1978년부터는 대구한약협회 등이 ‘대구 약령시 부활운동’을 벌였고, 1988년 8월 1일 당시 보건사회부로부터 전통한약시장으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약령시로 인증을 받은 대구 약령시는 2005년 한방특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현재 약령시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와 동성로3가, 계산동1가, 계산동2가, 수동, 종로2가, 장관동, 상서동 일부를 포함하는 길이 715m의 도로변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도로변을 따라 많은 상가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 80%가량이 한약 관련 점포들이다.
대구 약령시는 중앙대로와 달구벌대로를 가로지르는 도심에 있으며, 대구도시철도 1호선과 대구도시철도 2호선이 지나는 반월당역 18번 출구에서 630m 떨어져 있어 도보로 2~3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또한 약전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은 제일교회, 교남YMCA 등의 근대 건축물이 있는 거리로 도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 있는 계산성당, 진골목, 경상감영, 서문시장 등의 주요 콘텐츠와 연결 맺기 움직임이 있어 대구광역시 중구의 걷기 투어로 적합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약령시를 듣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발흥하여 오래도록 큰 시장으로 번창한 대구 약령시는 대구광역시 의료 전통의 뿌리로 평가된다. 따라서 대구를 주 무대로 한 근현대사를 언급할 때 약령시에 관한 이야기는 늘 따라 나오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주는 가장 빠른 길 또한 약전골목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구에 처음 기독교를 전래한 서양 선교사인 베어드(William M. Baird)[한국명 배위량]와 애덤스(James E. Adams)[한국명 안의화]는 약령시 일대에 터를 잡았다. 시인 이상화(李相和)가 살던 동네도 약전골목이며, 소설가 김원일(金源一)이 「마당 깊은 집」에서 1950년대를 그려 낸 동네 또한 약령시를 배경으로 한다. 시인 유치환(柳致環)이 한약상 아버지를 따라 누볐던 동네도 약전골목이며,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李陸史)가 한때 장사를 하며 독립운동용 무기를 ‘한약재 수입 루트’를 통하여 들여오려 한 동네 또한 약령시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독립운동가 김관제(金觀濟), 이상정(李相定), 서상일(徐相日) 등을 배출한 곳이 약전골목이다.
수십 개의 근대식 건물이 늘어서 있고 전통의 향기가 물씬 나는 약전골목은 한의학을 접하여 보지 않은 미국, 유럽 등지의 관광객들에게 이색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물론 한의학에 익숙한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관광객들에게도 약전골목 체험은 인기를 끌고 있다.
약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 중 한 곳으로 ‘대구 약령시 점포박물관’이 있다. 대구 약령시의 일부 한약방 점포 자체를 박물관으로 지정하여 약전골목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선정하여 둔 것이다. 점포박물관 안에는 다양한 소장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대구 약령시 점포박물관’은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대구광역시와 대구광역시 중구청에서 공동 주최하는 사업이며, 대구약령시상인회와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이 공동 주관하고 있다.
1926년 문을 연 한약재 점포에는 한약방의 역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작은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100여 년에 걸쳐 사용하여 온 약사발, 약저울, 처방전 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3대째 한자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점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약전골목의 산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구 약령시의 점포박물관들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약전골목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살아 숨 쉬는 전통의 명맥을 체감할 수 있게 한다.
약령시 이야기를 한번에 듣기 위하여서는 대구 약령시 한의약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의약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한약방을 재현한 모습과 영상을 통하여 한의약에 대한 상식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실 약초 표본 등을 둘러봄으로써 다양한 약초를 눈으로 확인하여 가며 알 수 있으며 전통적인 한약 그릇과 『동의보감』을 비롯한 한의학 관련 저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신의 체질을 알아보고, 한의약의 원리를 배운 뒤 전문적인 상담도 할 수 있다. 미리 예약을 할 경우 한방 족탕 코너도 준비되어 있으며 한방차 시음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대구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은 1982년 한약재 전문 도매시장으로 개설되었다가, 1985년 약전골목에 위치한 수협 남대구지점 2층에 ‘한약재 상설전시관’을 건립하면서, 1993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51-1로 이전하였다. 2009년에 ‘약령시한의약문화관’으로 재개관하였다가 2011년 비로소 ‘약령시한의약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 3층 전시실에는 100년 전의 약전골목을 모습을 재현하여 놓고 있어 350여 년의 역사를 잇는 약령시를 시간 여행하기에 알맞다.
대구 약령시한의약박물관 건너편에는 에코한방웰빙체험관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2012년 10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약 2년에 걸쳐 옛 이해영정형외과 건물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였다. 기존 건물의 내외벽과 발코니, 굴뚝 그리고 계단 등은 그 흔적을 남겨서 당시의 장소성을 살렸고 나머지 부분은 새로이 증축하여 환경과 한방 관련 전시·체험 공간을 조성하였다. 에코한방웰빙체험관은 1층, 2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층에는 에코 전시실과 전통찻집 다향이 있고 2층에는 힐링타임, 사랑방 휴, 휴게 테라스, 약초 갤러리 등이 있다.
[약령시를 맛보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 일대에는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도 많지만 무엇보다 한약재를 직접 맛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한약재 맛보기는 대구 약령시 체험의 진수이다. 대구 약령시에 밀집하여 있는 한약방·한의원·약업사·인삼사 등 350여 개의 한방 관련 업소와 약령시 전시관 및 약재 도매시장에서 맛보는 400여 가지 우리 약초의 영험함이야말로 약전골목의 자랑거리이기 때문이다. 약전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진하게 맡을 수 있는 약재 냄새 덕분에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다.
‘신토불이’는 우리 몸과 살아가는 땅이 하나라는 말이며, 우리 땅에서 생산된 것이 우리 몸에 가장 잘 맞는다는 것이다. 신토불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음식 재료와 약재인데, 대구 약령시에서는 지역의 특산품과 한방 제품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 한약재 인삼은 물론이고 대구 약령시의 모든 한약재에는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으며, 생산지까지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구·경북은 한약재의 재배 면적에서 전국 2위이며, 생산량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경상북도 영주시의 하수오, 안동시의 산약과 형개, 문경시의 오미자, 고령군의 향부자, 영양군의 강활과 두충·천궁·대황, 영천시의 시호와 작약·자소엽 등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생산되는 약재들은 대구 한약재 도매시장으로 집하되어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또한 녹용, 영지버섯, 황기, 헛개나무 등은 약전골목의 인기 상품이기도 하다.
대구 약령시에서는 한약재와 곁들인 식사도 가능한데 구석구석에 유서 깊은 식당들이 많으며 한정식이나 백숙과 같은 건강식을 주로 맛볼 수 있다. 특히 삼계탕은 약전골목의 인삼 이미지가 더하여져 더욱 인기 있다. 대체로 인삼주가 식사와 함께 제공된다.
[약령시에서 건강을 찾다]
약 350년 전통의 대구 약령시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한방 문화의 요람이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은 조선의 백성들이 약재를 편히 사고 팔 수 있도록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약령시장을 여는 것을 윤허하였으며, 이때부터 대구는 건강을 책임지는 도시로 거듭났다. 대구 약령시는 일반 정기시장과는 다르게 관청에서 필요한 약재나 희귀한 약재를 먼저 구입한 이후에 의원이나 일반인이 약재를 살 수 있었다. 관청의 구매는 대구 약령시의 권위와 신용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최고의 약재시장이던 대구 약령시는 언제나 붐볐으며 큰 잔치라도 열린 듯 종종 흥성거렸다. 약령시가 개시되면 대구읍성 사방의 관문으로 조선 8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이웃 나라의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상품을 사고팔았다. 덩달아 중간상인 및 약령시 주변에 있는 객주, 거간, 여각이 발전하여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대구 약령시는 한약재의 유통과 관련하여 보건의료적 기능과 지역 경제를 이끌어 온 원동력으로서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재를 거래하는 국제시장의 역할도 하였다.
과거 정기시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려는 취지로 대구 약령시에서는 한방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978년 제1회 달구벌축제의 일환으로 시작된 대구약령시 한방문화축제는 이후 매년 봄, 대구 약전골목 일대에서 열려 우리 땅에서 생산된 약재들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조선시대 약령시 개장 행사를 현대적으로 승화한 한방문화축제에서는 체질별·생활주기별 약선 음식 전시 및 체험, 근대문화골목투어, 한방체험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한약방 체험장’에서는 약 썰기, 약 갈기, 저울 달기, 약첩 싸기 등 한방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체험도 할 수 있다. ‘한방 먹거리 마당’에서는 동의보감 북 아트 체험, 약초 꽃 핸드 페인팅, 약초 꽃 페이스 페인팅, 약초 꽃 네일아트, 약 찻잔 예쁘게 빚기, 한방 팩 체험 등이 마련되어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대구약령시 한방문화축제는 2001년부터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문화관광축제로 20년 연속 선정될 만큼 대한민국 한방 문화의 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구 약령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인데다 장소도 도심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 자원으로 키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인근의 영남대로와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계산성당,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도심 투어가 인기를 끌면서 약령시를 다녀가는 관광객도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