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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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沙果-, 大邱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구의 상징 능금.
[능금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대구가 사과로 유명하게 된 데에는 온도의 차이가 심한 기후 조건과 자갈과 모래가 많은 충적 분지라는 알맞은 재배 조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토종 능금이 사라지고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사과가 ‘대구 능금’이 되었다. 능금은 능금이라는 이름 외에도 임금, 빈과, 평과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임금(林檎)은 11세기 고려 숙종 시기에 북송의 손목이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기록되어 있다. 빈과(蘋科)는 중국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 가져온 이름이다. 평과(苹果)는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대구에서 사과 재배를 할 때 부르던 이름이다. 그러다 사과의 이름은 ‘능금’이 대세가 되고 1970년대까지 주류를 이루었다. 196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과’라는 명칭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면 일반적인 이름이 되었다.
[대구 능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사과는 작고 단단하였기에 ‘돌사과’라 불렸다. 우리나라 사과의 재래종이었다. 『경북과물동업조합』에 따르면 서양 품종으로는 1892년 영국인 선교사 플레처(A. G. Flecher)[한국명 안목사(安牧師)]가 들여와 자신의 집에 심은 것이 최초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상품성과 경제성을 갖춘 사과의 재배는 1905년에 일본인들이 대구에 들어와 과수원을 열면서 본격화되었다. 사과 묘목은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효고현[兵庫縣], 가가와현[香川縣]에서 러시아계 사과 품종인 홍괴(紅魁) 50그루, 보리사과로 불리는 축(祝)[Tearmain] 60그루, 기타 120그루 등 합계 330그루를 들여와 심었다. 그 뒤에 홍옥(紅玉)[Jonathan]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 대구의 사과는 동인동, 상동, 중동, 하동, 평리동, 방촌, 동촌 등으로 재배 지역이 넓어지고, 급기야 경산, 영천, 달성, 칠곡 등 대구 인근의 경북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대구 능금의 생산과 유통의 틀을 갖추다]
대구에서 사과가 재배된 이래 1916년에 이르러 사과를 비롯한 배, 복숭아, 포도 등 과일의 동업조합으로 경북과물동업조합이 설립되었는데, 중심은 사과였다. 조합의 설립 계기와 과정은 1912년에 비롯되었다. 1911년 5월 칠곡 왜관에서 병충해가 발생하여 농가들이 피해를 입자 병충해를 막을 필요가 제기되면서 1912년에 왜관과수조합이 창립되었다. 이어 1912년 6월에 대구과수재배조합이 창립되고, 1914년 8월에 대구과수조합으로 개칭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의 제령으로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이 발포됨에 따라 기존의 대구과수조합을 해산하고, 경북과물동업조합이 설립되었다. 경북과물동업조합은 1950년대에도 이름이 유지되었다.
경북과물동업조합은 사과를 비롯하여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등을 포괄하였다. 경북과물동업조합의 주요 사업은 첫째, 도외 반출의 과실 검사와 포장 검사, 둘째, 생산용 물품의 구입 또는 생산품의 판매에 관한 매개, 셋째, 과실 판매 조사, 넷째, 강습 강화 및 품평회의 개최, 다섯째, 기타 과수 재배의 개량, 증식에 필요한 사항 등이었다. 경북과물동업조합은 잡지 『경북의 원예』를 발행하였다. 1929년 경북과물동업조합의 조합 지역은 대구를 비롯하여 달성, 경산, 칠곡, 김천, 선산, 청도군 일부 등 1부 6개군이었으며, 조합원 수는 140명, 재배면적은 129정보, 연 생산고는 50만 관 정도였다. ‘대구 능금’은 일본과 중국 만주로 수출되어 판로를 넓히면서, 대구의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능금을 노래하다]
대구의 상징인 능금은 노래로 불렸다. 최초는 1947년에 이응창 작곡의 권태호 작사로 만들어진 4절의 「능금 노래」이며, 1970년 길옥윤 작사, 작곡에 패티김이 부른 「능금꽃 피는 고향」이다. 이 두 노래는 「대구시민의 노래」와 함께 1970년 대구시가 ‘건전가요곡집’이라는 제목의 LP로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1절 능금능금 대구 능금 이 나라의 자랑일세/ 너도나도 손을 잡고 힘을 다해 배양하세
2절 능금능금 대구 능금 꽃만 봐도 아실 것을/ 빛도 좋고 향기 좋니 맛은 다시 묻지 마소
3절 능금능금 대구 능금 옹기종기 괴여 놓고/ 청실홍실 걸쳐 놓아 백년해로 맺는구나
4절 능금능금 대구 능금 사시강춘 자서 보소/ 언제라도 젊고 젊어 불로장생 하오리다.
[후렴] 에헤 좋고 좋다 에헤/ 좋고 좋다 능금 노래를 불러 보세
1950년대 대구 능금을 선전하는 문구도 만들어져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대구 능금의 품질 우수성과 효과를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생산되는 사과 품종은 홍옥이 가장 비중을 차지하였고, 국광과 축이 순서를 이루었다.
〈한국명산 대구능금, 능금나라 경북 품질은 세계제일〉
○ 능금은 자연의 치료제 가장 가치 있는 강장제
○ 건강은 능금의 상식(常食)으로부터
○ 능금은 미맥(米麥)과 같이 상식화되어야 한다
○ 능금은 비타민 ABC를 포함한 자연의 강장제
○ 능금은 소화효소를 함유한 자연의 소화제
○ 능금은 치아의 강장제며 혈액의 청량제
○ 매일 한 알의 능금은 의사를 멀리한다
○ 능금은 각기를 예방하며, 뇌신경 골격의 영양이 된다
○ 능금 상식자는 감기와 변비를 모른다
○ 능금 소비량은 문화수준의 바로메타
[사라지는 대구 능금]
1970년대 이후 대구사과 과수원은 크게 줄었고, 경산, 영천, 달성, 칠곡 지방의 과수원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 대신 성주, 고령, 군위, 안동, 영주, 봉화, 문경, 청송, 울진, 영덕 같은 곳에서 사과 재배가 늘었다. 그래서 1979년부터는 ‘대구 능금’이라는 상표가 ‘경북 능금’으로 바뀌었다. 이때 사과 품종에도 변화가 생겼다.
1960년대까지는 홍옥과 국광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도, 골덴, 후지 등의 새 품종이 중심을 이루었다. 후지는 저장성이 좋고 단맛이 많고 가격도 비싸 서울로 많이 팔려 나갔기에 ‘서울사과’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결과였다. 1965년 12월에 건설부고시 제2078호로 ‘대구시 도시계획 지구지정’이 공포되면서 대구종합개발계획이 마련되었다. 1968년에 제2차 도시계획안이 입안된 것을 계기로 대구의 풍광은 크게 바뀌었다. 제2차 도시계획안은 동대구역 건설을 통한 동대구 개발계획이 핵심이었다. 대구에서 가장 넓은 도로인 동대구로가 건설되었다. 이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동대구 뉴타운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에 농경지였던 곳이 시가지로 바뀌고, 사과 과수원이었던 곳이 상가로 탈바꿈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대, 1970년대 대구의 도시계획에 따라 동부 외곽에는 주택단지와 교육시설이 들어서고, 서북 방면에는 3공단과 같은 공업지대가 조성되고, 남부 외곽에는 주택지대가 조성되었으며, 곡식과 채소가 많이 나던 수성들이 사라져 갔다.
1976년 대구는 도시계획에서의 제4차 재정비를 추진하였다. 농지보전 중심의 정책으로 불요불급하게 지정된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을 축소하여 시가지를 고밀도의 입체적 방법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의 추세가 더욱 강해지면서 도시에서 농지의 잠식은 대세였다. 더욱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땅값이 치솟아 새로운 과수원 조성은 어렵게 되었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에서 인건비가 올라 일손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대구의 명품, 과일의 왕 사과를 지켜라]
대구의 명품인 사과의 명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노력의 하나가 사과를 식품으로 가공하는 것이었다. 1962년 대구에 최초로 하루 60톤 생산의 사과 주스 공장이 세워 동남아에 수출하였다. 1971년 대구시가 대구사과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예산 1,165만 원으로 457평[약 1,511㎡]의 부지를 확보하여 ‘대구사과센터’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말에도 위기에 빠진 사과를 구하기 위하여 술, 통조림, 쥬스 등으로 가공식품 개발에 주력하였고, 사과의 신품종 보급, 능금아가씨 선발대회, 증산왕 선발대회 등을 비롯하여 사과 먹기, 사과 깎기, 품평회 등의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능금 아가씨 선발 대회’는 사과를 많이 먹어 아름다운 미모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선전하려는 의도에서 열렸다. 이런 대구의 명품이자 과일의 왕인 사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대구와 경북 사과의 행정 주무부서인 경북 농정과 사과계는 벽면에 ‘사과는 과일의 왕위이다. 사과의 왕위를 사수하자’는 구호가 붙을 정도로 각오를 다졌다.
[사과과무가 늙고 병들다]
1970년대 도시가 확대되어 사과 과수원이 크게 줄어드는 가운데 사과나무도 노후목이 되었다. 대구 인근의 경산, 안심, 하양, 진량, 영천 등지의 사과나무 60%가 30년이 지난 노후목이었다. 보통 25년에서 30년생이 전성기이고, 40년을 지나면 수확량이 급격히 떨어지며 50년이 지나면 아예 경제성이 없다. 게다가 1976년 3월 경북능금조합의 발표에 따르면 도내 288만 그루의 사과나무 가운데 대구, 경산, 영천 등 3개 시군에서 자라고 있는 72만여 그루가 부란병(腐爛病)[사과나무의 죽은 조직을 통해서 감염되는 곰팡이병]과 탄저병의 피해를 보면서 폐목 위기에 놓였다. 이런 이유로 사과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사과밭을 갈아엎고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증가하였다. 1975년 60여 과수업자, 1976년 50여 과수업자가 사과를 포기하고 소채 재배와 복숭아 재배로 바꾸었다. 이런 환경에서 대구 동구 방촌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백 아무개 농민은 1만 2000평[3만 9669㎡]의 602그루의 사과나무를 캐내고 봄소채 재배에 나섰다. 그 결과 대구에서 사과 과수원은 410정보[4.06㎢]에서 157정보[1.56㎢]로 격감하였다. 또 대구 인근 경산, 영천, 칠곡 등 전통적인 사과 생산지에서도 사과 재배면적이 크게 줄었다.
대구와 대구 인근의 사과 품종은 오래된 사과나무만큼이나 오래된 축, 홍옥, 국광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반면, 대구와 대구 인근을 벗어나 경북 각 지역으로, 합천 등 경남으로 확대되면서 ‘대구사과’라는 이름 대신에 ‘경북사과’, 심지어 ‘영남사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품종도 전통적 품종이 아닌 골덴, 인도, 스타킹, 후지, 무스, 스타크림손, 메구미 등은 새로운 품종의 재배로 바뀌어 갔다.
[대구의 명품 능금, 제주 감귤에 밀리다]
1970년대 제주 감귤이 청과 시장에서 대중들의 입맛을 서로 잡으면서 사과의 아성을 위협하였다. 1978년 제주 감귤 생산량은 10만 7000톤으로 사과 생산량 42만 8000톤의 25% 정도였지만 증가율은 이국적인 맛과 향취로 급상승하였다. 그에 따라 사과 농사는 일년 내내 일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품삯이 오르면서 적자가 생기고, 그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사과밭을 팝니다’라는 전단지가 자주 눈에 띄게 되었다. 또 과수원을 팔려고 내놓아도 사는 사람이 없어 폐농 위기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능금은 사과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대구 능금’은 사과라는 이름으로, 사과는 능금으로 이름으로 혼용하여 불려 왔다. 대구 명품, 대구 특산품, 과일의 왕으로 상징되는 대구사과의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2019년 광복소나무사랑모임, 평광동발전위원회, 대구경북능금협회 등의 ‘대구사과 120년 기념행사추진위원회’ 구성과 ‘대구사과 120년 기념역사문화행사’의 개최로 나타났다. 대구사과의 재배면적과 생산이 예전처럼 회복될 수 없을지라도 오랫동안 대구의 상징으로 터 잡았던 ‘능금과 사과’는 대구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